관객은 왜 이 이야기에 끌려들어 갔는가?
어떤 작품을 보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적는 것은 내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때론 그 이유를 적는 게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의 분량보다도 길어지기도 한다.
그걸 누군가는 "인정중독"의 한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 걸 궁금해할 사람이 없을 텐데도 이유를 구구절절이 적어서 인정받으려는 거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듣고 보니 그 말이 맞게 들렸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인정중독"인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작품을 본 이유를 구구절절이 나열하던 습관을 줄이려고 애를 써봤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그런데, 솔직히 나 말고 이 글을 세세히 보는 사람이 정말 있기는 있을까? 일기장처럼 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거의 아무런 독자의 피드백이 없는 이 외로운 브런치의 한 칸에서 썼던 글을 다시 보고 다시 손보고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나 혼자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인정받고자 하는 대상은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있을 여러 독자분이 아니다. 중요한 독자는 결국 나인 것이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왜 그렇게 그 작품을 보게 되었고, 보면서 든 생각은 뭐고, 그렇게 들게 된 생각은 그 이유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방식으로 사고를 하고 왜 했는지를 평가하는 건 나다.
그러고 나니 아무리 길어져도 상관이 없는 것은 어떤 작품이던 그 작품을 보게 된 이유를 적는 것이다. 이제는 자유로워졌다.
그 누군가의 말인 "인정중독"으로 보일까 가 두려워서 이유를 나열하는 것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또한 그 누군가의 인정을 구하는 어떤 면에서의 또 하나의 "인정중독"이니까.
어쨌든 같은 것이라면 편하게 원래 하던 것을 그대로 하겠다.
인스타를 보던 페이스북을 보던 이제는 아무런 소리든 뭔 말이 되는 소리든 아니든 간에 그럴듯하게 영상이나 그래픽으로 만들어서 써서 올리거나 그럭저럭 들을만한 음악과 올리는 이가 많이 늘었다.
특히 인간이 원래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자신의 모습을 일정한 이미지로 포장하거나 때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많은 심리적인 트릭을 모아서 "다크 심리학"이란 제목으로 펴내서 성공하고 이른바 베스트셀러로도 만들어 내자마자 유사한 콘텐츠가 넘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이 그 내용에서 읽은 내용을 실천하기 시작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상대방보다 심리적인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서로를 무시하고 멀리하고 소언 하며 감정을 숨기는 경향이 몹시도 강해졌다.
그래서 결국 그 책이나 그 심리 트릭에서 배운 것을 실행하는 것이 효과가 안 난다.
그런데, 모두 쓰고 있으니 나도 안 쓸 수 없고, 안 쓰면 나만 뒤처지는 셈이 되니 기를 쓰고 예외 없이 똑같은 행동양식으로 빨리도 멀어져서 뿔뿔이 흩어졌다.
사회를 분열시키는 공작을 누군가 이 방식이 가장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서 하고 있다면 분명히 성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꼭 문제라고는 하고 싶지 않지만, 고등학교 친구 5명이 똘똘 뭉쳐서 만들어서 불과 수년 전까지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단톡방에서 누가 말을 올리든 간에 서로 반응이 없어졌다.
그러다 오늘 깨달았다. 내가 있던 없던, 그 단톡방이 있건 없건 간에 이 5명 전부가 되었든 그중에 한 60%가 그리 된 것이든, 자신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지 않는 관계에 대해서 심드렁해진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별도의 카톡을 각각에게 보냈더니 그제서야 답이 왔다.
이 모임 관계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개개인적으로는 지인으로서의 응답은 해도.
아마 나중에 청첩장이나 조문을 보낼 일 등이 생기고 나서야 이 단톡방에 메시지가 도착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확률상 보내는 게 안 보내는 것보단 나은 시도인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것이 단톡방에 메시지를 하나 뿌리는 것이니까. 수학적이고 경제적이고 심리적인 계산에 따른 대화만 오가는 것이다.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찾아서 나왔다. 한 달이 되든 반년이 되든 이 단톡방에서 내가 나간 지를 확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도 같은 기능을 써서 그 방을 완전히 나가 버렸는데 몰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30년이고 40년 지기건 간에 서로 필요 없으면 그 관계는 사라진다. 이게 지금이다.
거기에다 이제는 툭하면 "머리 좋은 사람"은 친구가 많지 않다느니, 고독을 통해서 발전한다느니 꽤 그럴듯한 표현이 넘실넘실 나와서 손절을 하고 고립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사회를 분열시키고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로 살아가게 만들고, 아무도 돕지 않고 도움도 요청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사회와 인생에 대해서 아무 기대 없이 건조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 자의 완승이다.
그러고서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에 나를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로 10년 전에 이끌어 왔던 부장 한분이 자리로 찾아와 "오늘이 회사 출근하는 마지막 날이에요"라고 이야기를 했다.
엉겁결에 손을 붙잡고 인사를 했지만, 이직을 한 뒤에 서로 친하게 지낸 시간이 돌아보니 3~4년 밖에 되지 않았고, 띄엄띄엄 얼굴만 마주치며 살다가 다른 일을 하면서 지내다 보니 서먹서먹한 상태였다.
서로가 무슨 뒷얘기가 있는지도 모른 채로 그저 한 직장에 있던 두 사람이 별 관심 없이 6~7년여를 보내다가 한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자신이 그만둔 건지 아니면 회사가 그만두게 만든 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반대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뒤늦게서야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아예 알지도 못했던 사람과 대화하는 것만도 못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듯했다.
모바일폰이, SNS가, 수많은 OTT와 AI툴이, 우리가 서로 몸과 마음을 맞대고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대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집중도를 거의 완벽하게 낮춰버린 것이 이 같은 현실을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시대는, 사람이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심정과 이유가 옅게 남아버린 시대인 것이다. 이것은 한국만의 풍경도 아닐 것이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기재와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사람들은 더 넓고 깊게 편하게 실시간적으로 교류를 더 넓혀갈 수 있을 거라 오래전엔 꿈꿨었지만 이 세계는 비참한 관계의 빈곤 속으로 우릴 떨어뜨렸다.
관계를 밀접하게 이어가지 않을 수 없는 아내에게 카톡을 남겼다. 이번에 회사를 그만두게 된 그 부장을 같이 알고 지냈었기에 이야기를 했다. 내 기분이 매우 꿀꿀하다는 걸 이해해 줬다.
3~40년 지기가 이제는 더 모르고 관심도 없는 내 삶을 이해하는 아내가 갑자기 너무도 고마워졌다. 그리고 육아와 가사 지원, 식이조절 등을 강조하며 잔소리를 해대기 일쑤인 그가 오늘은 극장에 들려서 영화를 한편 보고 오세요라고 이야길 해줘서 그 고마움은 기쁨으로 번졌다.
하지만 마치 암시처럼 이미 볼 작품을 정해놓은 것도 아내였다. "자기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천만이 넘게 본 '왕과 사는 남자'는 꼭 봐야 하는 작품 아니야?"라고 평소 개봉영화에 아주 띄엄띄엄 관심을 보이던 그가 두어 차례 그렇게 얘길 했었고, 다른 눈에 띄는 작품도 없어서 그걸 봤다.
이젠 천삼백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이 영화는 도대체 얼마나 잘 만든 것일까 궁금했다.
보는 동안 이 작품이 별다른 문제나 앞뒤 아귀가 안 맞도록 잘못 편집된 것 같진 않다는 매끄러움은 느꼈지만, 이것이 정말 전체 한국인 중에 20% 가까이 되는 사람이 찾아와 볼만큼 "잘 만들어진 위대한 작품"이란 평가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수없이 극화를 보면서 감을 잡을 수 있었던 복선과 암시의 배치, 그리고, 극화 속에서 나타난 사물이나 현장, 말이 대부분 인과를 가지고 연결되면서 끝까지 이어지는 치밀함은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디렉팅과 연출은 일정 이상의 수준을 갖춘 전문 감독과 스태프진이라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영화의 전통적인 문법에서 크게 벗어난 변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천재성이 번득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해진"이란 배우가 "엄흥도"란 인물에게 입혀서 만들어낸 인간적인 "단종"과의 다채로운 관계의 변화, 즉, 처음엔 현실적인 보상을 구하는 관계에서 실망하여 애증 하는 관계, 주종의 관계, 서로를 아끼는 관계,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관계, 죽음을 무릅쓰고 예를 표하는 관계까지의 스펙트럼은 찬란한 무지개처럼 여러 색상을 뿜어냈다.
마치 반듯하게 잘 닦인 거울처럼, 이러한 "유해진"이란 배우의 "엄흥도"는 다시 "박지훈"의 처음 나타났던 무기력과 죄책감, 자포자기의 어리석은 자세에서 점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벗어나 타인과 교감하고 타인을 도울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두려움을 넘어 자기 권능과 위엄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변화하며 호응하고 있었다.
이 두배우의 지속적으로 서로를 변화시키면서 호응하는 연기 속에서 관객은 오랫동안 사라졌던 자신이 갈증을 느끼고 있던 서로의 안위를 살피고, 서로에게 인정받으려고 대우하고, 주종의 관계에서 존경할 수 있는 자격은 종을 돕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할 때 생기는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그 모든 쓸데없으니 사라져야 한다는 인간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인간성의 서로 끌리는 요소를 오랫동안 릴스와 동영상, 특수효과, 복잡하고 첨예하고 영리한 플롯, AI가 만든 갖가지 판타지, SNS에 마치 사람에게 인간성 따위는 약점이니 드러내지 말라는 훈계조의 가이드에 맞춰서 눌러놓고 있던 인간성이 다시 잠시나마 회복되는 현상을 겪었다.
그 훈계를 상징하고 권력에 확실하게 사로잡힌 치밀하고도 강박적인 빌런 "한명회(유지태)"의 연기는 일종의 삶 속의 불가피한 재난처럼 "노산군"과 "엄흥도"를 압도적인 힘으로 덮친다.
눈 양쪽이 비대칭의 짝짝이임을 강조하며 일부러 살을 찌워서 만든 탐욕까지 덕지덕지 씌운 "유지태"의 연기는 나머지 주연급 배우의 선량한 인상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재난을 맞은 우리가 떠올랐다.
"왕"이라고 해서 자기 권력으로 마음껏 아랫것들을 다루고, 필요할 땐 죽음도 명하고 과도한 희생을 강요하는 존재만은 아니었을 것이란 상상 또한 이 작품이 되살려 준 중요한 판타지다.
이 영화를 본 사람만큼이나 많은 이가 성공했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가두고,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지금보다 더 큰 난국을 만들었을 것이 분명할 불법 계엄을 아직도 옹호하고 있다.
그게 통치자의 행위로써 용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 같지도 않은 논리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잡아 누른 자신의 양심과 원래부터 그런 권력자 자체가 세상에 있어선 안된다고 믿는 모두가 적어도 이 작품을 보는 순간에는 모두 같은 마음으로 그런 권력자가 아닌 "단종"이자 "노산군"인 "이홍위"의 모습은 그런 지도자를 원하는 우리의 본능과도 같은 진심이 개방되게끔 한다.
억지로 눈물을 만들어 내는 것 같은 연출이 전혀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역사적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감동을 얻게 만든 것은 단순히 이 작품이 갖고 있는 품질의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것을 수많은 관객이 보게끔 만든, 이 시대의 말라붙은, "인간성"이 사라져 가는 풍경 속에서 인간으로서 느끼는 "인간성"을 옹호하는 문화 상품에 대한 "갈증"이 해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갈을 가져온 가장 큰 공헌자는 물론, "유해진"이란 배우였다. 그의 연기로부터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지금은 사라진 원형적인 "인간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아니었다면, 누가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었을까 싶었다. 친구들과의 단톡방이나 오랜 직장 동료, 심지어 같이 사는 아내조차 서로 주고받기 어려운 그 귀한 유물이 나타난 것이다.
그 갈증의 해갈을 느낄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작품이 앞으로 더 사랑받을 것이다.
집을 나서거나 타인과 온오프라인으로 만날 때, 또 감정과 진심을 억누르고 수많은 계산을 거쳐서 정제된 언어로 심리트릭을 떠올리며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사람들과 긴장되면서도 유연한 척 냉정한 게임을 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 작품을 봤을 때의 기억은 진심으로 약간 울게도 웃게도 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성공적인 작품은 매우 희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