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2부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헌트"가 이어갔던 것 같다.
(표지사진 출처: News1)
어제 디즈니플러스에서 “신세계”를 봤다. 참 오래도 미뤘다. 봐야지, 봐야지 하고 13년을 중얼거렸으면 사실 안 본 게 아니라 일부러 아껴 둔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무간도”를 너무 주의 깊게 봤고, “디파티드”도 나름대로 깊게 남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늘 쓸데없는 겁이 생긴다. 뒤늦게 본 작품이 괜히 내가 먼저 좋아했던 작품들의 정서를 망가뜨릴까 봐. 그렇게 질질 끌다가 결국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괜한 걱정이었다. “신세계”는 “무간도”의 정식 리메이크는 아니지만, 경찰이 범죄조직에 들어가 스파이로 살아가는 기본 모티브를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 영화는 “무간도”가 품고 있던 홍콩 특유의 공기, 그러니까 오래된 중화권의 역사와 지정학적인 불안, 그리고 “무간지옥” 같은 종교적 상상력까지 엮여 있던 그 깊이를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는다.
대신 그런 부분을 덜어내고, 한국 관객이 훨씬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깎아 놓았다. 더 노골적이고, 더 감정적이고, 더 관계 중심적이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답습이라기보다 꽤 능숙한 현지화에 가깝다.
무엇보다 놀랐던 건 배우들이었다. 이미 비교 대상이 너무 강력하다. “무간도”의 “양조위”, “유덕화”, “디파티드”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맷 데이먼”, “마크 월버그” 같은 얼굴들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데, 그걸 알고도 이 영화의 배우들이 밀리지 않는다는 건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다.
한국 관객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쪽이 더 세게 들어오는 장면도 적지 않다. 익숙한 한국어의 리듬, 한국영화 특유의 감정선, 그리고 배우들이 뿜는 얼굴의 질감이 있어서다. 잘 만든 장면도 많지만, 결국 이 영화를 오래 붙드는 건 사람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보다 보니 자꾸 “헌트”도 떠올랐다. “이정재”가 “신세계”에서 만들어 냈던 그 얼굴, 그러니까 어느 한 세계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이용당하고 밀려다니면서도 끝내 자기 선택을 하게 되는 그 인물의 정서가, “헌트”에서는 전혀 다른 시대와 체제로 옮겨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 그렇게들 원했던 “신세계 2”가 진짜로 이 제목으로 나오지 않았더라도, 비슷한 감정의 후속 편 같은 것은 이미 다른 방식으로 한 번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같은 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관객이 “이정재”라는 배우에게서 다시 보고 싶었던 어떤 표정과 긴장은 분명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보게 되니, 왜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는지도 조금 알 것 같았다. 단지 잘 만든 조폭영화여서가 아니다. 이 영화의 구조가 너무 쉽게 현실을 닮아 있다.
꼭 조폭 조직이 아니어도 된다. 회사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업계도 그렇고, 사람 사는 웬만한 조직이 다 이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겉으로는 “명분”과 “질서”, “시스템”과 “원칙”을 말하는데 실제로 돌아가는 건 누가 누구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누가 누구를 끝까지 의심하고, 누가 누구를 버리느냐의 문제인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신세계”는 범죄영화의 옷을 입고 있지만, 실은 한국 사회의 조직논리를 꽤 적나라하게 압축한 영화처럼 보인다.
특히 “강 과장” 같은 인물은 그래서 더 불쾌하고도 인상적이다. 이 사람은 정의로운 경찰의 얼굴이 아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삶쯤은 얼마든지 갈아 넣을 수 있는 권력의 얼굴에 더 가깝다.
영화 속에서 그는 대의를 말하고, 원칙을 말하고, 희생을 말한다. 그런데 그 희생은 늘 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그런 종류의 인간은 현실에도 너무 많다. 스스로는 늘 옳은 편에 서 있다고 믿으면서, 정작 다른 사람은 말처럼, 숫자처럼, 소모품처럼 다룬다.
그러니 “자성”이 어느 순간 경찰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선택을 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정의로운 제도가 끝내 인간을 구원해 줄 거라는 기대를 시원하게 부숴 버린다.
반대로 오래 남는 사람은 “정청”이다. 이상한 일이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폭력적인 자리에 있는 인물인데도 결국 제일 인간적으로 기억된다. 이 영화에서 진심으로 “관계”를 믿고, “의리”를 감정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정청”뿐이다.
그래서 그가 더 슬프다. 현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는 틀린 사람이다. 비효율적이고, 감정적이고, 위험하다. 냉정하게 처신해야 살아남는 세계에서 그런 태도는 늘 미련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런데도 관객은 그런 배역을 오래 기억한다.
아마 지금 세상에서는 그런 태도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들 효율을 말하고, 성과를 말하고, 생존을 말한다. 믿음이나 의리 같은 말을 꺼내면 촌스럽다고 하고, 실제로 지키려 하면 바보 취급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비웃으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그런 종류의 관계를 그리워한다. “신세계”는 그 모순을 꽤 정확하게 건드린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은 총격도 아니고 피의 복수도 아니었다. “정청” 같은 인간이 더는 살아남기 어려운 세계 자체가 더 비극적으로 보였다. 모두가 계산하고, 모두가 의심하고, 모두가 먼저 버리려고 준비하는 세계에서 혼자 관계를 믿는 사람은 결국 늦게 깨닫거나 먼저 죽는다.
이 영화가 끝난 뒤에 남는 감정이 통쾌함보다는 묘한 허무와 그리움에 가까운 것도 그래서인 것 같다. 살아남은 사람이 이긴 것 같지는 않고, 권력을 쥔 사람이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다.
제목은 “신세계”인데, 정작 그 새 세계가 더 나은 곳이라는 보장은 조금도 없다. 다만 이전보다 더 능숙하게 거짓말하고, 더 차갑게 버티는 사람이 그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 “신세계”는 “무간도”나 “디파티드”와 닮았으면서도 끝내 다른 곳으로 간다. “무간도”는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야 하는 지옥의 감각이 핵심이었다. “디파티드”는 그 지옥을 훨씬 더 냉소적이고 건조하게 밀어붙였다.
반면 “신세계”는 배신과 기만의 세계 속에서도 끝내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가를 “관계” 쪽에서 찾는다. 나를 소모품처럼 써 버린 조직이 아니라, 적어도 한순간 나를 사람처럼 대해 준 쪽으로 기울어지는 선택.
그게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묘하게 많은 한국 관객이 그 선택을 납득하게 된다. 이 영화의 대중적 힘은 아마 거기에 있다. 착하게 살면 보상받고 배신자는 벌 받는다는 뻔한 결론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위험하지만 훨씬 더 솔직한 결론을 택했다는 점.
13년 동안 미뤄 둔 영화치고는 기대를 거의 배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봐서 더 잘 들어온 부분이 있었다. 예전에 봤다면 아마 멋있는 장면, 배우들의 카리스마, 반전과 배신에 더 크게 반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이 영화는 훨씬 더 삭막하고, 그래서 더 쓸쓸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런데 또 사람은 끝내 사람을 완전히 믿지 않고는 못 산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지 보여 주는 영화처럼 보였다. 세상은 점점 “강 과장” 같은 얼굴로 굴러가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결국 “정청” 같은 인물을 더 오래 붙든다.
머리로는 다들 손익을 계산하면서도, 마음은 계산 밖에 있는 관계의 흔적을 자꾸 찾는다. 그런 점에서 “신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한국적이고, 생각보다 훨씬 더 슬픈 영화였다. 오래 사랑받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