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헤일메리: 팝콘과 외계인 사이에서

지구를 떠난 곳에서도 효과를 보는 연결성이라는 것에 대한 동화

by Roman

(표지 출처: Men's Journal)


일요일 저녁, 집에서 걸어갈 거리에 있는 동대문 현대아웃렛 CGV에서 7시 30분으로 예매를 잡았다. 이런저런 다른 볼일을 엮어서 그곳까지 걸어가는 길이 나쁘지 않았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프로젝트 하일메리가 아직 흥행의 열기를 잃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상영관 안을 가족 단위 관객과 수많은 커플이 빼곡히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곡당 천 원의 노래방과 방치된 팝콘

이 동대문 CGV에는 흥미로운 시설이 있다. 상영 전 긴 대기 시간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노래방 부스 두 개다.


오락실처럼 상대적으로 큰돈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곡당 천 원이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계산이 들어맞았는지, 젊은 커플들이 번갈아 가며 그 두 부스를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길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넓은 공용 테이블 위에 커다란 팝콘 한 통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채로, 그 자리에 이미 30분이 넘도록 그대로였다.


나와 마침 지나치던 한 가족의 아버지, 이렇게 두 사람만이 그것을 눈여겨보았고, 서로 점원이 듣도록 한 마디씩 했다. 없이 살았던 시절을 온몸으로 통과해 온 사람이니 나올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이거 벌써 30분째 여기 놓여 있는데요. (누가 버리고 간 건지도 모르는데) 치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점원들은 들리지 않는 척 지나쳤다. 결국 카운터 너머에 있는 점원을 직접 불러 팝콘을 건네며 설명했다. 주인 없는 대형 팝콘이 공용 공간에 30분 넘게 방치되어 있으면, 어린 친구들이 CCTV가 돌아가고 있다는 걸 미처 생각 못 하고 한 줌 집어 먹을 수도 있으니, 일단 직원이 보관했다가 찾는 사람이 오면 그때 돌려주는 게 낫겠다고. 그게 모두를 위한 방법이라고.


점원은 한사코 받지 않으려 했다. 건네주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영화가 막 시작될 무렵, 노래방 부스에서 나온 커플이 점원에게 무언가를 말하더니 그 팝콘을 돌려받아 유유히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그들의 것이었다. 노래방 부스에 들어가면서 공용 테이블에 올려두고, 노래를 다 부르고 나와서도 당연히 거기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잠시 멍했다.

풍요가 일상이 된 사회에서 자란 세대에게는, 음식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귀중품이든 옷가지든 전자제품이든 잠시 어딘가에 두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다.


방금 극장에서 산 팝콘을 공용 테이블에 두고 노래방에 들어가는 것도, 그들에게는 전혀 불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내가, 결핍의 시대를 살아온 노년 세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체감했다.



프로젝트 하일메리 — 결핍이 만들어낸 기적

그런 기분을 안고 들어간 상영관에서 본 영화가 하필 프로젝트 하일메리였다는 것이 묘하게 어울렸다.


마션의 원작자 앤디 위어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태양의 열에너지를 먹어치우는 정체불명의 우주 미생물 '아스트로파지'가 확산되면서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 전체가 서서히 얼어붙을 위기에 처한다.


유일하게 그 미생물의 영향을 중화시키는 곳으로 확인된 별, 타우세티. 인류는 마지막 희망을 그곳에 걸고, 아스트로파지를 연료 삼아 편도 우주선을 쏘아 올린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이들이 현지에서 발견한 해결책을 지구로 전송하는 것, 그것이 임무의 전부다.


"인터스텔라", "판타스틱 4 최신편"을 비롯해 우주 공간을 다룬 수많은 영화와 비교해도, 이 작품이 구현한 우주의 질감은 한 단계 더 진보해 있었다.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는 1인극에 가까운 상당 부분을 혼자 이끌어가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우주에서 혼자 눈을 떠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관객을 자연스럽게 그 공간 안으로 끌어당겼다.


나중에 밝혀지는 그가 편도 우주선을 타게 된 과정의 이야기는 또한 우리가 엄청난 용기를 가진 영웅이 꼭 아니더라도 어떤 순간엔 서있는 그 자리에서 영웅적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설사 평범한 학교의 과학교사라고 해도.


(출처: Cinemotic)


무엇보다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 구조, 세계관을 가진 두 생명체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인간끼리의 협력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주 생명체와 교감하며 해법을 찾아가는 이 이야기는, 단순한 SF 스펙터클을 넘어 '연결'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다.


(출처: IGN)


극장을 찾은 것이 축복처럼 느껴지는 영화였다.


팝콘과 우주선 사이,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

영화 전후로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지금의 풍요가 영원히 계속되리라 믿는다면, 그 풍요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고 불편한 관계는 정리하며 사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세련되게 포장하면 '선택과 집중'이고, 조금 솔직하게 말하면 일종의 귀족주의다.


그러나 삶은 생각보다 훨씬 가변적이다. 물질의 결핍이 아니더라도, 건강이든 관계든 사회적 위상이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흔들리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때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평소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과 최소한의 연결을 유지해왔느냐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무조건 편한 사람만 남기고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은, 어쩌면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도를 스스로 낮추고 사회적 영향력을 조용히 잠식시키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이 '사회적 지능이 낮은 선택'이라는 말은 다소 거칠게 들릴 수 있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오늘 나는 방치된 팝콘 하나를 두고 점원에게 말을 걸었고, 그 덕에 커플은 노래방에서 나와 구매한 상태 그대로의 팝콘을 되찾아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 작은 일이 거창한 의미를 가지는 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낯선 상황에 개입하는 일이 점점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회라면, 우주에서 혼자 눈을 뜬 라이언 고슬링이 외계 생명체와 손을 잡는 그 장면이 우리에게 그토록 뭉클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풍요 속에서도 결핍의 시기를 대비하는 감각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남이 탐낼 물건을 오래 방치하지 않는 작은 배려까지도. 오늘 영화를 앞뒤로 보면서 새삼 되새기게 된 것들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