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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Feb 03. 2016

<아멜리에>-자기 자신이 없는 오늘

그런 오늘은 어제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아멜리에를 홀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상처받아왔고, 상처받기 싫어

자꾸 내면으로 도망가는

아멜리에를 감상하기에는

혼자가 좋았기 때문이다.


아멜리에가 영화 속에서

종종 보여주는 장면은

상상으로의 도피다.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상상의 차원으로 도피하게 되는

그 순간들은, 인생에 있어서

사실은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다.


물론, 그건 여아냐 남아냐의 차이,

그리고 집안 환경, 사회의 조류 등의

난수 등의 개입에 의해서

달라지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아멜리에는 이른바

말만한 처녀가 되기까지도

상상으로 도피하는

가련한 인물로 나온다.




상상으로 도피한 천사


아멜리에라는 영화 속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상상의 차원으로

도피하게 된 과정은

절절히 설득력이 있다.


메마른 감성의 부모,

따뜻함을 선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의,

그리고 그러한 사례들과의

지속적인 접점이

유아기에 지속되면,


아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 스트레스를 돌파하려는

지혜를 짜내게 되는데,

바로 아멜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상상의 공간을

현실의 공간보다 더 넓히는

것이었다는 가정,


이 설정은 이 약간은

판타지 장르 같은 영화의

시작을 부드럽게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든다.





표현주의 영화와 사실주의 영화

고등학교 시절,

영화에 광적으로 빠져들었던

친구의 교묘한 화술에 속아서

영화 만들기에 빠져 있었던

때가 있었다.


친구는 내게 "루이스 자네티"가

지은 두껍고(1000page정도)

노란색의 표지를 가진 영화 교본,

"영화의 이해"라는 책을 같이

읽도록 거의 강제하다시피 했다.


나중에 영화 관련 교양과목을

들으면서,  교수님에게

"그렇다면 영화라는 것은

'표현주의'와 '사실주의'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책에서

강조되게 나온 분류법에

따라  이야기했다가,


"그건 단지 한 종류의 영화 가설,

이론일 뿐입니다"라는 답변을 듣고,

'음, 영화 공부를 했다는 말은

어디 가서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것은 아주

영화를 분류하는데 용이한 방식이다.


우리가 "딕 트레이시"나 "마스크",

그리고 대부분의 판타지 장르나,

애니메이션을 영화로 구분할 때,


영화감독이 치중하고 있는 것이

영화적 표현 그 자체인가 아니면,

보다 현실을 도드라지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치중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이 두 가지로 구분을 하는 것만으로,

좀 더 영화 이해가 말끔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라쇼몽 같은 영화도 명백히 표현주의의 영화라 할 수 있다. 환상적인 스토리, 인간성의 특징을 돋보이게 만드는 용도로 영화의 모든 장면들이 "표현"을 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아멜리에는 표현주의와

사실주의를 즐겁게

짜깁기 하는 영화다.


아멜리에는 눈으로

관객들과 때때로 대화한다.


이것은 영화적 상황이고,

감독은 여러분에게

독특한 표현방식으로

말을 걸고 있어요,


현실과 혼동 말기를 바람...

이게  되풀이되고 있다.




아멜리에의 꿈과 감정이 한 눈에


그 때문에, 영화는

감독과 관객이

영화 스크린을 통해서

대화하는 환경을

적절히 제공한다.


우리의 가장 행복해야 할

유아시기에 기쁨을 적절히

누리지 못한 주인공은

어떻게 이 영화 속 환경에서

행동하게 되는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그렇다 정말로 아멜리에는 토끼가 된 구름을 볼 수 있고 사진에 담을 수도 있다.




아멜리에는 자신이 누리지 못한

사랑받는 기쁨의 크기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천사가 마치, 자신의 즐거움과는

무관하게 인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아멜리에는 강박적이라 할 정도로,

자신 주위의 사람들의

기쁨에 집중하며,


그들의 뒤나 옆에서,

사람들 너머에서,

그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

그들이 놓친 것,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을

어떻게라도  가져다준다.




유럽 공동체적 관심사

이 영화 개봉 전에 다이애너비가 사고사를 당했었다.


아멜리에는 그녀의 죽음을

TV로 보면서, 화들짝 놀라버린다.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영화 속으로 다가오는 것은,

다이애너 황태자비의 죽음이다.


그녀는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테레사 수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돕는데 아낌없이

모든 것을 바쳤던 유명 인사이다.


그녀가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고 하던 그 순간,

알 파예드와의 밀회를

따라붙어 취재하려는

파파라치와의 추격전 끝에

차량 사고 때문에

결국 생을 마감하고 만다.

프랑스 영화이지만,

전편에 아멜리에의

현실적 대극의 인물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영국의 전 황태자비,

다이애너이다.


그녀의 생애는 이 영화 속에서

희화화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좀 더 미화되고 있는 것일까?


아멜리에는 남을 돕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자기 인생을 깨닫는다.



그녀는 TV 앞에서,

다이애나비를 추모하는

다큐멘터리 속에

자신의 현상황을 밀어 넣는다.


평생 남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살지만, 정작 자신의 기쁨은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젊은 나이로 죽어버린

자신의 환영을 절절히

바라보면서  눈물짓는다.

누구나 천사를 원하고 있지만,

천사의 필연적 불행을

연민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다.



그런 아멜리에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생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그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녀의 욕구불만이 비유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분은,

쌀알이나 콩, 잣 등이 담긴

가마니 속에 손가락을

깊숙이 파묻는 행위 내지는,

딸기잼 위에 형성되어 있는

막을 숟가락으로 깨는 행위......



그녀의  가슴속에 심장이,

그의 눈 앞에 이르러서,

전등처럼, 빛나는 광경은

귀엽다 깨물어주고 싶어

못 견딜 지경으로 만든다.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물로 녹아버리거나 심장이 벌겋게 뛰는 장면이 만화처럼 나온다




그녀의 작전

TV와 케이블에서 수차례나

방영된 스토리와 화면을

내 입으로  또 한 번  이야기하는 것은

우습기  그지없는 노릇이라,

그녀의 작전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두겠다.

그러한 작전을 통해서,

그가 자신을 신비하게

여기도록 만들고,

관심을 갖게 만드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에게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사랑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녀는 도망치고, 도망치고,

조로의 가면을 쓰고 사진을

보내는 정도일 뿐,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그것은

너무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건,

그녀의 인생과는 다른 이야기,

상상으로 도피하여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던

자신의 세계와는

다른 이야기이니까...





그녀의 도움은 다시 도움으로

돌아오고

유리 인간이자 화가인

할아버지에게도

기쁨을 선사하던 아멜리에,

그 아멜리에와 유사한 것은

마치 이 시대의 모든

대중 예술가들의 초상처럼

상징화된 모습이다.


대중 예술가는 심오한

더 깊은 차원의 예술가인

할아버지 화가의 삶을

보다 즐거운 곳으로

건져준 대가로써,


진정한 충고를 결정적인

순간에 듣게 된다.


그녀의 집 문 앞까지 찾아온,

사랑하는 남자의 방문을

어설피 거부한 아멜리에 앞에

나타난 화가 할아버지는

"지금, 그 순간을 놓치게 되면,

넌 썩어버리게 될 거야...

그건 쉽게 오는 순간이 아니야.

지금 당장 달려가서

그를 붙잡아..."라고 한다.


이 말에 아멜리에는 다시

방문을 열게 된다.


감동적인 표현주의 영화답게,

그 남자는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해피엔딩.

그리고 고양이처럼

서로를 더듬듯이

입술과 손가락으로

메 만지는 두 사람은

실루엣 너머로

진한 사랑을 나눈다.

할아버지 화가의 방에서

그 실루엣을 바라보는 두 사람,

아멜리에로부터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아온


맨날 야채가게 주인으로부터

구사리를 먹는, 외팔이 점원과

늙은 화가는, 이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다시, 시사적인 문제,

"사실주의 영화"로 돌아오면서,

이 화면을 캠코더로 찍고 있던

외팔이 점원을 꾸짖는

늙은 화가 앞에서,

멋쩍게 캠코더를 내리는

 점원의 모습은,

다시 현실적인 메시지를 준다.


"타인의 기쁨, 타인의 내밀한

사생활에 너무 관심 갖지 마시오,

딱, 알아야 할 부분까지만

알면 됩니다."


다이애나비의 죽음에

영향을 끼친 파파라치에

대한 경고 같은 대사다.




자기 자신이 없는 오늘은,

어제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아멜리에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동네 골목길의 벽면을 통해

한번 더  되풀이된다.


타인의 기쁨을 위해서,

열심히 상상력을 발휘하고,

노력하여, 그 기쁨을

어김없이 주었을지라도,

그 안에 진정한 자기 자신의

기쁨이 거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을

자꾸만 어제의 찌꺼기를

계속 쓸어 담는 생활로

이끌어 갈 뿐이다.


대중 예술가는,

아주 기쁜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사회 복지가나,

기타의 천사표 인간들은

솔직히,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 이외에도

자기 자신의 인생을

보다 기쁘게 살 필요가 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기쁘게 해 준 사람들"

보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일 수 있다.

당신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

그것의 필요성을 절절히 느끼며,

타인에게 그것을 선사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슬프기  그지없다.


역사상 최고의 코미디언이

솔직하게 남긴 말은

그것이었다고 한다.

"내 인생은 너무너무 한

비극이었다"


(이 주일님조차,

타인을 웃겨왔음에도,

담배를 두 갑 이상이나

매일매일 피워야 할 정도로,

권태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마초 구속 연예인들이건,

뽕이나 마약류, 항정신성

약품들과 도박에 빠져든

유명인들을 보자면)

나는 내가 있는

오늘을 살고 싶다.

우린 각자가 충실하게

그 안에 있는

오늘을 살고 있을까?  

잃어버린 "나"라면,
잠시 후라도 찾아 두고

같이 오늘을 지내시기를...




아멜리에는

달콤한 초콜릿을
처음 깨물 때의 느낌을

혓바닥 위로
올려주는 영화였다.


우리가 연인과 사랑을

하게 되는 그 달콤한 환상과

감촉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과 그 결과에만

진정한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신의 선택과

즐거움, 감정, 그리고

사유와 합일된 그 상황에

바로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거한다.


이런 이야기를

가볍게 던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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