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외출을 쉽게 포기해버림, 속상함
오늘은 내가 오랜 시간 좋아해온 이모티콘을 만드신 작가님을 만나러
지하철을 타고 뚝섬역에 내려서 전시장에 가볼 계획이었다.
나라는 사람을 돌아보면 어떤 것을 맹목적으로 좋아하기도 어려우며,
싫거나 부도덕한 일들 또는 치명적인 면들이 발견됐을 경우 역시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옳다. 동경하는 것은 최고로 훌륭하다" 라는 마인드로
가치와 생각들을 대하지 않는다.
무언가 마음 속의 깊은 울림이 사로잡혀야 내 마음 한 켠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있는 것 같다. 작가님의 그림과 생각들을 나누어주시는 공간에는
뭔지모를 따스함이 느껴져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성수동은 평소 자주 가지 않는 동네인데다가
가보고 싶던 전시에 간다는 설렘으로 들떠있었다.
카페를 알아놨고, 티라미수와 따뜻한 티를 마실 수 있다는
즐거움도 좋았다.
*비록 비가 너무 많이내려서 외출, 작가님 책에 직접 받으려던 친필싸인을 포함한
그 설렘과 부수적인 감정들은 전부 날아가버렸지만...,
지난 주중에 분명히 나는 갈 계획이 있다고만 말했고,
남편은 그럼 자기도 같이가자고해서 같이 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돼있었다.
같이 가자고 말한 적이 없다.
아무튼 서점에 가서 작가님의 책을 구매하고, 버스에 타서
우리 집 앞에 내리기 전까지는 이런 결말은 예상을 조금도 못했다.
하차한 순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슬슬 숨통을 조이는 습기의 집합체도 따라 오는 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허탈하고 시무룩한 스스로가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
지금도 지겹게 느껴지고 축축 쳐지는 중이다. 울적하다.
비오는 자체를 안좋아하는데다가 모처럼의 나들이가 다 뒤틀려 버렸다.
아까 집에 오는 길에 남편이 좋아하는 삼계탕 재료들과
망가진 주방 가위 대신 자리해줄 잘 드는 절삭력 좋은 주방가위를 사왔다.
종량제 봉투에서 사온 것을 꺼내어 정리하면서 거실에 누워있는 남편의 얼굴을 무심코 봤다.
딱 생각난 속담이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바위는 말이 없었다.
나는 꿈쩍않는 바위를 향해 가위를 내미는 격이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중복이던데, 삼계탕 해줄려고 사왔어" 이거 봐봐.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굳이 보라고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핸드폰만 보고 있는데...
내가 말을 던지고 나 혼자 상처받은 격이라 뭔가 더없는 민망함의 연속이었다.
그는 죽도 끓여달라고 말한 후 안경을 안쓰니 잘 안보인다고 말했다.
많이 들은 이야기지만 유독 오늘 마주한 얼굴에는 "아 너무 귀찮다. 집에 있고 싶다"가
서예 붓으로 쓴 글씨처럼 크게 비췄다. 같이가봤자 나 혼자 신날 것 같아서 고민끝에 말을 건넸다.
어차피 혼자 가면 서둘러 가서 주변을 구경해 볼수도 있고,
혹시나 동선이 길고 복잡해지면서 바뀔 그의 표정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결코 떠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루하고 따분했던 남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소 외출할 때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운동화를 신기 편하게 꺼내놓은 것이 무색해져서
신발장에 그 신발부터 조용히 집어 넣고, 나는 비오는 날 신기 좋은 신발로 바꿔 신고
길을 나섰다. 이 순간 갖가지의 기분을 느낀 것 같다. 허탈함, 허무함, 머쓱함, 편안함 등.
집을 나서자마자 빗줄기가 삼십배 이상은 족히 굵어진것 같았다.
입고 나온 옷이 전부 적셔졌고, 신발은 굽이 있는 운동화였지만 축 늘어진 스펀지 같았다.
5분 거리 정도의 지하철역까지 닿지도 못하고, 포기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보통 집에 있으면 비가 후두둑 떨어지면, 소리가 들리기 마련인데,
남편은 비가 많이 오는 것도 모르고 안방에서 에어컨을 틀고 편히 쉬고 있었다.
속마음을 조금 토로해보자면, 남편의 휴식 공간에서 나만 빠지면 유독 편해보였다.
내 나름대로는 잔소리도 안하려고 하고, 집안일도 정말 도저히 안될 때 도와달라고 하는 편인데,
내 잘못인가 싶기도 하다. 마음이 참 헛헛하다.
생각을 좀 더 하고 다시 말을 건넸다.
"앞으로는 무언가 내키지 않으면 그냥 시원하게 말을 해."
남편은 다시 대답했다. "배려해줘서 쉬라고 해서 알겠다고 했으면 그 뒤엔 그만 말해야지. 떠본거야?"
무언가 명치 끝에서부터 전율이 올라왔다. 떠본거라니......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지?
차마 내가 진짜 하려고 했던 "가지 말자고 하니 표정이 너무 즐거워보여서 속상했다"는 말은
꺼낼 생각도 안하고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울면 진다'는 말의 값어치를 제대로 처음 생각해 본 것 같다.
아파트 내에 있는 도서관으로 노트북과 읽을 책, 다이어리, 노트, 필통,
충전기, 무선이어폰, 마우스를 좁디 좁은 에코백이 미어터지게 담고 내려왔다.
작은 가출을 감행했다. 비만 안왔으면 더 멀리 가보는 거였는데 아쉽기 그지없다.
내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자신의 핸드폰에 보여주는 애정과 다정함을 보다가
나한테 날카롭게 말하는 말투가 마음에 꽂혀서 집으로 방향을 돌리고 싶지가 않다.
분명 우리집이지만, 오늘 '집'은 그냥 오롯이 남편의 집인 것 같다.
비가 좀 그쳐줬으면 좋겠다. 집이 아닌 곳에 들렀다 가지 않으면
속상함은 애매하게 풀리거나 뭉쳐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