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그의 에세이에서 이런 생각을 밝혔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나는 이 말이 문학의 속성을 정확히 짚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심연을 다루는 작업이다. 사람의 내면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내려가면, 그곳엔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것들이 한두 가지씩 자리한다. 하루키는 그런 ‘불건전함’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유효하게 다루는 법을 탐구했다. 하루키가 매일 달리기를 하는 이유도 그 연장선에 있다.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반대로 건강한 육체와 일상의 시스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에는 늘 두 세계가 공존한다.
— 혼돈과 균형, 불안과 평온, 불건전함과 건전함이 서로를 보완하며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이 대립적이지만 공존 가능한 세계관은 불교의 일심(一心) 사상과 닮았다.
‘깨끗함과 더러움은 둘이 아니고, 서로 다르지 않다.’
하루키의 아버지가 불교 쪽 인연이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의 ‘중도(中道)’적 사고방식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삶의 뿌리에서 비롯된 태도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지나 사유보다는 습관으로 살아간다.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하루의 대부분은 루틴 속에서 흘러간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 일기를 쓰려해도 막상 잘 써지지 않는다. 일기란 결국 내면의 상념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작업인데, 그 내면까지 의식이 도달하려면 오랜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글을 쓰고 싶다면, 쓰려고 애쓰기보다 먼저 읽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읽다 보면 자연스레 사유가 생기고, 그 사유는 어느 순간 자신만의 문장으로 변한다.
막연히 ‘써야지’ 하고 펜을 들면 피상적인 일상 나열로 끝나지만, ‘읽은 것을 곱씹는’ 행위는 생각의 뿌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문학가나 예술가가 일반인과 다른 점은, 그들이 사유를 습관화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창작’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의식적으로 생각을 끌어올리고, 정리하고, 또 파헤친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의 글을 읽다가 종종 “나도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는데”라는 기시감을 느낀다. 그 기시감이야말로 작가가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직업적으로 추출해 내는 능력의 증거다.
이런 지속적인 사유의 결과, 작가들은 사회적 ‘껍질’을 뚫고 보통 사람은 좀처럼 닿지 못하는 인간의 심연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동물로서의 본능, 이기심, 욕망이 자리한다.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법륜스님은 “가장 지독한 욕심은 사람을 향한 소유욕”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인간이 왜 타인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지를 정확히 짚는다. 이 욕망을 탐구하는 일, 그것이 곧 문학의 핵심이자, 동시에 문학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이유다.
인간의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일상은 종종 무의미하거나 공허하게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인간의 욕망을 아무렇지 않게 일상 대화 속에 녹여내듯, 작가들도 현실과 심연 사이를 오가며 정상적인 감각의 균형을 잃기 쉽다. 그래서 몰입은 때로 위험하다.
장기하는 “무언가를 오래 하기 위한 힘은 몰입으로부터 멀어지는 데 있다”라고 했다.
하루키에게 그 ‘멀어짐’은 달리기였다. 예술가에게 환기란 생존의 기술이다.
너무 깊이 잠기면 가라앉고, 적당히 떠올라야 다시 잠길 수 있다.
나는 그래서, 예민하게 몰입하는 작가보다 적당히 환기할 줄 아는 작가를 더 좋아한다.
몰두와 몰두 사이의 공백이, 그들의 통찰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여섯 명 중 네 명이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통계가 있다.
그건 문학이 인간을 병들게 한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키나 장기하처럼 균형 잡힌 예술가들은 그 병을 ‘달리기’나 ‘거리두기’를 통해 중화시킨다.
그들은 불건전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감당할 체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 점에서 나는 그들을, 지혜로운 예술가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