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색
인간에게 참 멋진 약점이 있다. 완전히 똑같은 카피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이다. 존경하는 나의 영웅들과 완벽하게 똑같아질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만의 색깔이 드러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진화하는 것이다
_<훔쳐라, 아티스트처럼>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창작의 영역에서 모방이란 단순히 좋아하는 작가들이 어떻게 하는 지 보고 따라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구축하며 더 큰 자신으로 도약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대학생 때 취미로 썼던 글들을 올려보려 한다.
—
시계를 살펴보니 어느덧 밤 10시를 향해가고 있다. 서부라면 이제 막 지루한 낮을 대신해 화려한 밤이 시작될 시간이지만, 어쩐지 이곳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 같다. 아니면 유독 오늘 따라 날씨가 좋지 못해 일찍 집에 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까부터 바람의 세기가 심상치 않다.
20년만에 온 뉴욕은 굉장히 조용하고 또 재미없어 보인다. 거리에 사람도 거의 없고 영업중인 가게도 그리 많지 않다. 전형적인 모범도시의 모습이다. 하긴 이럴 줄 알고 서부로 떠난 거 였으니, 어찌보면 인생을 살며 잘한 판단 중 하나가 되었다. 본디 일천한 사람이 기회를 잡기 좋은 곳은 촘촘하고 반듯한 곳이 아닌, 사회 곳곳에 틈새가 많은 곳이니까.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친구와 마지막 저녁을 먹었던 음식점을 힘겹게 찾아왔지만, 왠 철물점으로 변해있었다.
‘하긴.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가게가 망하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그때 그 음식점 주인장의 별명이 ‘빅 조’였던가’
생각해보면 지금 이곳에 내가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절친했다지만, 연락이 끊긴지 거의 20년이다. 20년 뒤에 재회하자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천마일을 건너왔으니 말이다. 사실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도 고민했었다. 그럼에도 결국 20년 전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건 내 ‘감각’을 믿기 때문이다.
친구와 고향을 떠난 이유는 단 하나.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돈벌이란 대게 위험을 감수할수록 그 대가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다행히 내게는 재능이 있었다. 이를테면 ‘기민함’ 같은 것. 20살 무렵 같이 일을 시작한 녀석들 가운데 지금 나만큼 사는 이는 거의 없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이가 절반, 총을 맞고 비명횡사한 이가 또 절반이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큰 돈을 만지다보면, 돈 냄새를 맡고 어슬렁 거리는 족제비들이 주변을 배회하기 마련이다.
이런 인생을 살다보니 허울 좋은 쭉쨍이를 솎아낼 수 있는 선구안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 친구 지미 웰스는 겉은 밋밋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 수수한 겉모습에 자신의 능력이 감추어진 유형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지미는 행동이 느리고 말이 많지 않았는데 당시에도 난 오히려 지미의 그런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행동도 느리고 말도 많지 않은 지미가 조금도 답답하지 않았던 건, 지미는 꼭 필요한 말과 행동을 했고, 시덥잖고 불필요한 것은 잘 하지 않았다.
그러니 고민 끝에 뉴욕행 비행기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지미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그런 지미였기에 반드시 나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나올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직 약속한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조금씩 초조해지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혹시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마음 한켠에서 커져가는 듯 했다. 긴장된 마음을 달래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는데 왠 경찰관이 한 손에 곤봉을 들고 나에게 조금씩 다가 오고 있었다. 서부에서의 나라면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겠지만, 이곳은 천마일 떨어진 뉴욕이었다. 이 나라의 경찰들은 자기 구역도 아닌 곳의 범죄자를 상세히 파악할 만큼 성실하진 않다.
경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염려 마십시오. 뭐, 그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순찰중에 처음보는 이방인이 늦은 밤 홀로 거리를 배회하니, 혹시나 싶어 한 번 와본 것일테니 이정도면 충분히 의심을 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성급한 판단이었다. 경찰은 그 뒤로도 말이 없었다.할 수 없이 경계심을 풀기 위해 옛 가게의 이름까지 언급했다.
그러자 경찰이 입을 열고 천천히 내게 말 했다.
“오년 전까지 있었죠. 오년 전에 뜯어버렸습니다.“
5년 전 이면, 그래도 꽤 오래 가게를 영업했구나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20년이 아니라 조금 더 일찍 만나기로 할 걸 그랬다. 이런 난생 처음보는 철물점 앞은 옛 친구와 재회의 장소로 썩 어울리지 않는다. 서로의 기억을 공유한 옛 장소에서 다시 만난다면 얼마나 더 감회가 새롭겠는가.
이런저런 감성적인 생각에 빠진 탓인지,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경찰은 계속해서 말 없이 나를 주시했다.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잘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는 왠지 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 사람. 일을 할 때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의 사람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거리를 살펴보았다. 아직 지미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미와의 약속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혼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허탈해졌다.
잠깐 스며든 허탈함을 달래고 싶었는지 나도 모르게 옛 친구와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짧지 않은 내 말을 잠자코 집중하며 들었다. 이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나보다. 이야기를 마치고 시계를 살펴보니 어느 덧 약속 시간이 거의 임박해있었다.
그때 경찰이 물었다. “나는 가겠소. 당신 친구가 틀림없이 오기를 바라오. 시간은 일 분도 유예를 하지 않을 작정입니까?”
사실 나도 이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얼마나 기다릴 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오늘 지미를 보지 못한다면, 앞으로 영영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움직인 것도 내 딴에선 나름 위험부담을 감수한 일이다. 지금 순찰 중인 경찰에게도 이렇게 애를 써야만 하지 않은가.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기다려보고 싶은게 지금의 내 심정이었다.
“글쎄, 한 삼십 분 정도는 기다려야겠지. 이승에 살아 있다면 지미는 그때까지는 반드시 올 겁니다. 잘 가십시오, 경찰나리”
이 말을 들은 후 경찰은 다시 그의 담당구역으로 사라졌다.
날씨는 계속 더 험악해져갔다. 아까부터 불던 바람은 어느덧 비를 동반 한 채 더욱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인파는 더욱 줄어 기분 나쁜 적막함이 흘렀고 오직 바람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점차 내 꼴이 우스워보이기 시작했다.
‘하긴 나도 이제 늙은 거지. 너무 감성적이 된 거야. 연락이 끊긴지 거의 20년인데… 그런데 내가 아는 지미라면 분명 약속을 지킬텐데.’
어쩌면 난 이때껏 쌓아온 판단력보다, 20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친구의 신의를 더 믿어보고 싶었던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에게 서로의 마지막 모습은 순수했던 그 청춘의 모습이었으니까. 그걸 깨고 싶지 않았나보다.
거의 반포기하는 심정으로 줄담배를 피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찰나 저 멀리서 기다란 외투를 입고 외투깃을 귀밑까지 세운 키 큰 사나이가 곧장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 보브냐?”
뉴욕에서 나를 기억하는 존재는 친구 지미 밖에 없다. 그런데 왠지 오랫동안 만남을 고대했던 친구인데, 100퍼센트의 확신이 들지 않았다. 혹시 몰라 확인차 물었다.
“넌 지미 웰즈냐?”
이 말을 하면서도 왠지 바보 같았다. 지금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분명 20년 전 만남을 약속한 지미 밖에 없을텐데, 그걸 확인하려 하다니. 다만 지미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예상과는 다른 지미의 모습에 당황했다.
하지만 곧 이런 걱정은 의식의 밑바닥으로 사라졌다. 상식적으로 지금 이 사람은 지미일수 밖에 없었고, 이 생각을 한 번 하고 나니 아까 품은 의심을 한 내 자신이 오히려 이상해보일 지경이었다.
20년 만에 친구를 보니, 갑자기 내가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지미에게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물론 그리 영예로운 일들은 아니었지만, 내 친구라면 상관없지 않겠는가. 한바탕 이야기를 쏟던 와중에 불현듯 위화감이 조금씩 느껴졌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 몸에서 느껴지는 직감같은 것이었다.
‘ 이 사람이 20년 전 내 친구였던 내 지미라고? ‘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 길모퉁이에 밝은 등불 밑에 이르렀고 다시 한 번 지미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 사람은 지미가 아니다.
내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눈치챘는 지 지미를 사칭한 그가 말했다.
“넌 지금 끌려가고 있는 거야, 보브. 아마 이쪽으로 올 것 같다고 시카고에서 전보 연락이 있었어. 경찰서에 가기 전에 여기 부탁받은 편지가 있으니 이 창 밑에서 읽어 보게나. 외근하는 웰즈 군이 쓴 편지일세.”
한 순간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애써 정신을 차리고 편지를 펼쳤다.
“보브, 나는 우리가 약속한 자리에 나갔었네.
하지만 담뱃불에 비친 자네 얼굴을 보고 모든 걸 알았지.
자네를 직접 체포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다른 형사에게 부탁했네.
— 지미가.”
비는 어느새 폭우로 변해 있었다. 글자가 번지고, 잉크가 녹아내렸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세상에 단 하나뿐인 약속이, 그 빗물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