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삶

by 리을의 생각


그러고 보면, 나는 늘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릴 적 동네나 학교에서 달리기를 하면 줄곧 1등 아니면 2등이었는데, 여기에 딱히 내 노력이 깃들지는 않았었다. 그저 운 좋게 외국에서 군생활을 오래 하며 신체능력을 향상시킨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을 뿐이었다.

덕분에 체육시간은 늘 즐거웠고 운동회 같은 대회에서 친구들에게 쉽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린 시절에도 무의식적으로 여기에 내 지분은 사실상 거의 없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나는 그저 달렸는데 남들보다 더 빨랐고 그게 기분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 무렵, 영어와 불어를 하시는 아버지가 잠시 집에서 공부방 비슷한 걸 하셨다. 당시에 학교를 비롯한 생활권이 작은 아파트 단지 안에 밀집된 환경이었고, 자연스레 소문이 나 반 아이들 중 여럿이 우리 집에 공부를 하러 왔었다. 뛰어놀고 만화책을 좋아하던 나였는데 친구들이 우리 집에 공부를 하러 오니 나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그게 아니었다면 차분하게 공부를 하는 건 당시의 내 일상에서 없었을 것 같다.

하교를 하고 운동장이나 문화센터에서 축구나 수영을 하다 집에 와 저녁을 먹고 티비나 만화책을 보다 잠들던 일상에서 갑자기 떠밀리듯 공부를 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에 부모님이 압박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그냥 스스로 눈치를 보듯 분위기상 내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림이 좀 우스워질 것 같다고 여겼던 것 같다. 만화책을 보던 짬바(?)에서 나오는 집중력이 꽤 좋았던 건지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 뒤로 반에서 1등을 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과학시험이 조금 어렵게 나왔던 거 같은데, 시험 전날에 ‘이렇게 나오면 어렵겠는데?’라고 느꼈던 부분이 딱 문제로 나왔었다. 다른 과목들은 평이했던 탓에 과학시험에서 등수가 나뉘웠던 걸로 기억한다. 그 뒤 시험을 잘 본 게 소문이 나 우리 집에 공부하러 오는 친구들이 늘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렇게 공부를 시작하고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저 운이 나를 이끌었던 일들이었다. 우리 집이 갑자기 공부방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그저 수영이나 축구를 하고 기진막진한 상태로 집에 와 저녁을 먹고 티비를 보다 잠을 자는 그런 생활을 지속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 삶의 방향은 의지가 아닌 우연의 손길에 의해 조금씩 정해졌던 것 같다. 어쩌면 운이 좋다는 말은, 변화하는 환경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감각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 자주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건, 사계절이 있는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시간은 참 빠르다. 의식하지 않으면 더욱 빠른 게 시간인 것 같다. 그럴 때 계절의 변화는 삶을 돌아보게 도와준다.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있을 때면, 지금 이렇게 잘 달릴 수 있는 건 무더운 여름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몸을 잘 훈련시켜서라는 걸 깨닫게 된다. 삶에 대한 동기부여도 되고 그냥 선선한 가을을 느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좋다.


가을이 없는 곳이었다면 지금처럼 달리기를 즐기지 못했을 것 같다. 달리지 못했다면 아마 내가 쓸 수 있는 글 들도 지금보다 훨씬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많은 글과 생각들이 앉아서 보다는 오히려 달리면서 정리되고 분명해졌던 것 같다. 달리기를 하는 그 시간은 내게 꼭 필요한 공백이었다. 그 공백이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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