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란영웅전

첫사랑에게 4.5를 주는 바보는 없어

by 리을의 생각

1. 결국 우리는 누군가 희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걸까?


2. 그러다 백부장님까지 죽어요

백부장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이란 언제나 동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은 사람도 있죠

당신이 구하려는 생명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는 겁니다


3. 도플갱어가 사라지고 아무 변화도 없는 일상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저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질 뿐이죠

이들은 당신이 목숨바쳐 도플갱어를 물리쳤다 해도 그다지 감사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당장에 닥치지 않은 위협에 대해선 관심도 없을뿐더러 수비대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여길테니까요

그런건 상관없어요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이번엔 뒤를 돌아보세요

도플갱어의 살인극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놈이 이들 모두를 죽이기 전에 당신이 도플갱어를 찾아낼 수 잇겠습니까?

최악의 경우 지금 던전에 남은 인원 모두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물론 당신의 목숨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건 최악의 경우를 말하는 거잖아요! 꼭 그렇게 되란 법은 없어요! 제가 잘하면…

물론 백부장님이 잘 지휘한다면 도플갱어는 아무도 죽이지 못하고 당신들 손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도플갱어라고 완벽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당신이 그걸 할 수 있겠습니까?


4. 도플갱어가 나올 때까지 한명씩 죽였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 아니 자신의 동료들을 말인가요?

네 전사라는 게 원래 다 그런거죠 뭐

전사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걸 말하잖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채 개죽음 당하는 게 다반사죠

그렇다면 차라리 도플갱어를 잡기위해 희생되는 편이 더 전사로서 좋을수도 있어요

이 세상을 지킨다면 지키고 싶었던 ‘무언가’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을테니까요

전사는 그렇게 막 죽어도 된다는 말인가요?

뭐 그렇다기 보다는요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고 도플갱어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제게 없다는 얘기에요

백부장님은 어때요? 백부장님은 할 수 있나요?


5. 정의의 신 아델라는 눈이 하나입니다

눈이 두 개면 사물을 봄에 있어 거리감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과 가까운 것 먼 것을 구분하게 되죠

아델라는 모든 일을 차별없이 바라보기 위해 자신의 두 눈을 뽑아

하나는 자신이 삼키고 또 하나는 오른손에 쥐어 세상을 본다고 합니다

정의… 인가요 그러면 용사님이 도플갱어를 잡기 위해 동료들을 죽인 것도 그것도 정의인가요?

대답해주세요

백부장님, 백부장님은 전사입니다

백부장님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 검에 의해 다치거나 죽습니다

검으로 모든 이를 구원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죽을 자와 살자를 구분하는 것 뿐이죠

전사에게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리라도 있다는 건가요?

권리나 자격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냥 전사란 직업의 생리에 대한 얘깁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게 가장 좋겠죠

누군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전사가 필요한 겁니다



‘첫사랑에게 4.5를 주는 바보는 없어’


중학생 시절 내 최애 소설인 SKT의 리디북스 일등 작품평이다.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아 나에게 이 소설 속 주인공이 그런 존재였구나.’ 내게는 유년기부터 여러 첫사랑들이 존재한다. 바로 내가 즐겨 읽던 작품 속 주인공들이다. 윤리관이라던가 정의관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딱히 형성되지 않았을만큼 어린 시절부터 마음을 빼앗긴 매력적인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선의’를 추구하는 인물들이었던 것 같다.


어린이들의 눈은 날카롭다. 무엇이 멋진 줄 금방 알아차리고 그것을 모방한다. 흔히 말하는 자신만의 ‘추구미’가 있다면 쑥스럽게도 내게는 ‘선의’이지 않았을까. 그런만큼 지금도 사회적 이슈나 문제에 대해 무엇이 더 선에 가까울지 나름의 고민도 하고 스스로 납득할만한 설명도 내놓으며 고민도 많은 편이다.


이런 내 특성을 알아봐준 친구가 웹툰 ‘아스란영웅전’을 추천해주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곤 하는 내가 혹 독선의 길로 빠지진 않을까 나를 위해 균형을 잡을 좋은 작품을 소개해준 것 같아 단숨에 읽은 뒤 나름의 서평을 쓰려 한다.



‘용사가 구해야 할 다수, 희생되는 소수’


용사 아랑의 세계는 이분법적인 세계. 다수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것으로 세상(다수)을 지켰으며, 그것이 아랑 안에서의 신념이자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신념을 관철하는 것이 용사이다

아랑소드에게 정의이자 선은 흔히 말하는 ‘공리주의’ 그는 자신의 경험과 계산에 따른 최고의 상황을 도출해낼 수 있다면 희생을 만드는 데 일말의 동요조차 없다.

그리고 주인공인 아랑소드의 안티테제로 등장하는 백부장 세라핀은 복잡한 현실, 실제로는 선악이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늘 주저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떠오르는 건 역시 최근에 읽었던 작품에 등장하는 괴테의 색채론. 괴테의 철학적 관점을 가미한 색에 대한 이해로 요약하자면, 이 세계에는 언제나 안개가 끼어 있다. 즉 세계는 완전한 빛과 어둠의 중간에 있고, 그 빛과 어둠의 대립이 회색을 이룬다는 것.


백부장 세라핀은 세상이 어둠과 빛으로 명확히 나눌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 중간지대인 회색에 위치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웠으리라. 세상의 문제들은 대부분 명확한 답이 도출되지 않는다. 누가 옳고 누가 잘못되었는가. 무엇이 정의인가. 이런 질문을 두고 촌스럽다는 반응도 익숙하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이러한 경계를 두고 이렇게 논평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무엇이 올바른가.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세월이 흐르면 추는 기울어야 할 곳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것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결정된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무엇이 대가로 지급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주인공이자 용사라는 막강한 힘을 지닌 아랑 소드 역시, 종국에는 스스로가 소수의 입장으로 분류되어 제거되는 파격적인 결말은, 어쩌면 공리주의라는 구조가 합리적으로 보임에도 그 안에 내재된 잔인함과 숱한 사람을 희생시켰던 대가를 용사 자신의 목숨으로 치루었다는 느낌을 가져다준다.


아마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용사 아랑 소드처럼 사람의 목숨을 계산적으로 나누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백부장 세라핀처럼 세상을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갈라보는 극단적인 시선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결국 사람들의 집합이며,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는 스스로를 성찰해보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다. 나 자신이 결코 기계처럼 정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고, 세상의 문제들을 마주하는 우리는 결국 선악이 분명한 영역이 아니라 그 경계가 모호한, 모순이 섞인 지대를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회색빛의 세상에서 언제나 다수를 위한 길이 최선이자 정의임을 믿고 자신의 신념을 주저없이 관철시키며 소수를 희생시키는 주인공 용사 아랑소드를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처칠’이 불현듯 떠오른다.


영국의 작가 앤드루 노먼은 윈스턴 처칠의 심리 상태를 의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 ‘윈스턴 처칠 : 불안한 마음의 초상’을 집필하였는데 꽤 흥미로운 시각을 담고 있다. 처칠은 전쟁을 지휘하며 실제 군 장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모한 전략적 시도를 여러차례 감행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갈리폴리 전투’는 연합군 총병력 40만명 중 사상자 약 25만명 그 중 사망자만 10만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당시 이를 지켜보던 군 장교의 회생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처칠 그는 정말 두려움이라곤 없는 사람 같았다.’


앤드류 노먼은 그런 처칠을 두고 나르시즘적 성향을 말한다. 개인적인 결핍과 정신적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과오는 당연한 희생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정의를 역사라는 거대담론으로 투영시켜 일종의 방어 기제를 발달시켰다고 보는 노먼의 분석은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미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그 범위를 초월한 실수이기 때문이다.


결국 용사 아랑도 어쩌면 처칠처럼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이미 선을 넘어버린 그 희생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더욱 이분법적인 사고를 고수한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아랑과 처칠 모두 결국 구조적 필요에 의해 나타나야만 하는 난세의 영웅이었을 것이다. 아랑과 처칠 모두, 개인의 선택 이전에 구조가 만들어낸 존재였다면 그 대가로는 무엇이 지불되었을까. 아랑의 최후를 알고 있는 독자로서 불편한 마음을 어찌지 못한 채 이 글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