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세례

내가 두려웠던 것은

by 리을의 생각



재료와 사유들을 엮어 하나의 글을 쓰려할 때 잘 써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 계통이 너무 방대하고 아직 자신의 감각이나 통찰이 그것들을 아우를 정도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땐 다시 침전시키면 된다. 침전을 통해 원재료가 아닌 나만의 언어가 입혀진 가공물이 탄생한다. 여기에는 시간의 세례라는 양분이 필요하다. 결국 젊음은 발산이 아니라 응축이라는 어떤 감각이 내 안에서 꿈틀 된다. 젊어서 응축시키지 않으면 그 재료와 사유들이 시간의 세례를 받을 수 없고, 발산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된다.


돌이켜보면, 하루키의 문장과 사유를 차곡차곡 내 안에 응축시켰고 어느새 나는 그를, 그의 문장을 단순히 참고하고 인용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호흡으로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을 응축시킬 수는 없다 시간도, 생도, 감각도 유한하니까. 예전에는 줄곧 내가 하루키를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비로소 오늘 그 생각을 철회한다. 그리고 내가 그를 고른 것이 아니라 그가 내게 남았던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어쩌면 삶은 우리가 함께할 무엇을 고르는 게 아니라 유난히 내 곁을 지키는, 남아있는 무엇들과 함께 걷는 것 아닐까. 이상하리만큼 오래도록 남는 작가와 문장들. 그리고 그건 내 선택이 아니라 그때의 힘들었던 내 삶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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