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이라도 남을 수 있다면
책을 마주하게 되는 건 언제나 두 가지로 분류된다. 내가 의지를 갖고 찾는냐, 아니면 우연히 그것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느냐.
물론 시간과 취향이 쌓이면 전자의 비중이 높아진다. 갈수록 시간의 유한함에 겁을 먹고 무언가를 시작하기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제나 내가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자꾸 내 안에서 맴도는 책과 문장은, 후자였다.
운명처럼, 우연처럼 스치는 책은 보통 ‘문장’을 먼저 마주한다. 정말, 단 한 문장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그러면 꼭 그 책은 읽게 된다. 모르겠다, 사실 그 한 문장만 좋았던 책도 숱하게 많았다. 읽고 보니 정말 그 문장 말고는 어떤 밑줄도 긋지 않은 책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한 문장이라도 남을 수 있다면, 나에게는 좋은 책이라는 나만의 기준이 은근한 고집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권장도서, 필독도서, 평론가의 추천 등 좋은 책을 소개받을 수 있는 경로는 참 다양하다. 이를테면 ‘검증’받은 도서랄까. 검증에는 이유가 따른다. 어떤 지식을 얻기 좋은 책,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살펴볼 수 있는 책, 스스로 사색에 빠져 들게 만드는 책, 좋은 책은 많고, 이유도 많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내 기준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직관’이 훨씬 중요했다. 직관의 매력은 그것이 다분히 자의적이라는 점에 있다. 그것이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점에 있다. 오로지 고유한 나만의 기준인 것이다. 왜 그 문장은 내게 남는가. 왜 나는 그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는가. 사실 이건 완독 한 이후에도 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직관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명확해지는 나의 삶에 수수께끼라는 여백을 남겨준다. 가끔은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남겨두고 싶은, 그런 아이 같은 마음이 이런 식으로 표출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아마 사람의 이런 사고방식 내지 마음을 ‘경향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경향성이란 사람에게 부분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책을 대할 때의 이런 나의 경향성은,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삶의 모든 영역에 번져가고, 어쩌면 사람이나 사랑을 대할 때도 적용될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은, 소설의 첫 문장 때문에 반드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삶에서 가장 많은 밑줄을 그은 책이 되었다. 몇 년 전의 나는 문장마다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요즘은 잘 모르겠다. 의욕이 없다기보다는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고 더 시간이 지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몇 문장 정도를 선별해 쓰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욕구가 생겨서 다행이다. 나는 자연스러움을 사랑한다. 내 안에 샘솟는 이런 욕망은 늘 기쁨을 안겨준다.
사랑을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질문이 되지도 않는다. 얼마나 사랑할지, 제어가 가능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제어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대신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사랑만은 아니다.
_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바로 떠오른 이 문장, 하루키의 다른 책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문장으로 착각해서, 찾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확실히 이곳 사람들은 누구도 상처를 주지 않고, 누구도 서로 미워하지 않으며, 욕망도 갖지 않아.
모두 만족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어. 왜라고 생각해? 그건 마음이란 걸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이 도시의 완전함은 마음을 잃는 것으로 성립되는 거야.
(…) 마음이 사라져 버리면, 상실감도 없고, 실망도 없네. 갈 곳 없는 사랑도 없지. 순전히 생활만이 남네.
_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상처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만큼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다양한 표현이 있다. 등가교환의 법칙이란 말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상처를 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감각으로는 그만큼의 사랑밖에 얻지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랑은 결국 상대를 믿고, 상처를 허락하는 만큼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사랑은, 상대에게 나를 해할 권리를 스스로 건네주는 것이다.
만약 오랜 연애를 했음에도 상대에게 서운하거나 상처를 받은 기억이 없다면 혹은 괴롭지 않았다면, - 당연히 많은 반박이 있겠지만 - 정말 그게 사랑이었을까 한 번쯤 떠올려보게 될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 이런 불완전한 마음끼리 마주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응당 그것에서 파생되는 찌꺼기 - 질투, 기대, 이기심, 증오 - 가 생겨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을까.
마음은 정량할 수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잡을 수 없고 제어할 수도 없다. 그리고 허깨비 같은 이 불완전한 마음이 사실은 사랑의 거의 전부다. 그래서 반스는 제어할 수 있다면 사랑이 아니고, 제어한다면 사랑만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사랑을 이해하려 하고 자꾸 설명하려는 것은 사랑이 지나간 이후에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고 있는 당사자들은, 사랑에 관해 말하지 않으니까, 사랑의 언어는 언제나 당사자보다 사랑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올 때 훨씬 예리하고 적확하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언어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거기 있고 그냥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다.
결국 마음이 받게 되는 상처는 한 인간이 살아가며 세상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면, 나 역시 상대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설령 내가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잘한 일은 아니었다. 그 점에 대해 나는 거듭 용서를 빈다.
나도 언젠가 단 하나의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다. 하루키의 표현으로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자주 반복함으로써 더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반스의 소설을 읽고 난 뒤 진실이란 것은 어떤 정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태도에 따라 부단히 이동하게 된다는 걸, 바로 그 점이 이야기의 생명력이자 진수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공정, 나의 이야기에 공정이 존재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이야기든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도 그것을 납득했을 때 써야 할 텐데, 지금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매듭짓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애당초 나라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쓰게 될 나의 이야기에서 단 한 문장이라도 남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