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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버와 중2병이 만나면

모건하우절, <돈의 심리학>

by 알뜰살뜰 구구샘

제가 중학생 시절에는 아이리버라는 mp3 플레이어가 유행이었습니다. 그땐 천하의 삼성전자(옙)도 아이리버 앞에서 맥을 못 추던 시절이었죠. 중학교 친구들 너도 나도 저 mp3를 들고 다녔습니다.


중학교 친구들은 거의 다 '프리즘' 혹은 '크래프트'를 들고 다녔습니다. AA 건전지 하나면 음악 수 십 곡을 들을 수 있다니, 정말 부러웠죠. mp3로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를 듣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중학생 때까지 대중가요에 별로 관심도 없었습니다. HOT나 SES, 핑클 노래도 몰랐거든요. TV에서 음악프로를 보는 것보다 왕종근 아저씨가 나오는 생생정보통 같은 걸 보는 걸 더 좋아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랬죠.


그런데 사춘기 시절 또래집단이 참 무섭다고, 저놈의 mp3 플레이어가 너무너무 갖고 싶은 겁니다. 노래에 별로 관심도 없던 애가 갑자기 mp3 없으면 죽을 녀석으로 바뀌었습니다.


부모님, 저 mp3좀 사 주세요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당연히 소득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냥 오로지 소비만 할 뿐이었죠. 그런데 무슨 패기였는지 mp3 플레이어를 사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때 mp3 가격이 대략 30만 원 정도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 30만 원이면 지금 기준으로 얼마쯤 될까요? 한 60만 원은 넘지 않을까요? 월급의 거의 1/3을 턱 하니 내놓으라고 했으니 부모님께선 얼마나 황당하셨을까요?


"그래, 이번에 시험도 잘 봤으니까 조만간 사 줄게"


제가 얼마나 떼를 썼던지, 부모님께서 결국 승낙을 해 주셨습니다. mp3를 사 주시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저도 이제 mp3가 생긴다고요. '프리즘'과 '크래프트' mp3를 가진 친구들이 물어봤습니다. 어떤 모델을 살 거냐고요.


저는 아이리버의 최신형 모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니들은 구형이지? 난 최신형이야!'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거든요. 지금은 너무 부끄럽지만 15살 중2땐 진짜 저렇게 생각했습니다.


친구들이 물어봤습니다. 언제 살 거냐고요. 저는 머뭇거리다가 이번 주말에 사러 가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친구들이 그럼 다음 주에 한 번 구경시켜 달라고 하더라고요.


하교 후 저는 부모님께 떼를 썼습니다. 마치 30만 원을 맡겨 놓은 것처럼요. 최대한 빨리 mp3를 사러 가자고 요구했습니다. 당연히 부모님께선 난색을 표하셨죠. 지금 여윳돈이 빠듯하니 한 두 달 있다가 여유가 생기면 구매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꼭 아이리버 mp3여야 하냐며, 더 저렴한 mp3도 있지 않냐고 하시더라고요. 기다리다 보면 세일을 할 수도 있으니 그 기간을 노려보자고도 하셨습니다. 암튼 지금 당장은 어렵다고 하셨죠.


그때 저는 완벽한 중2병 환자로 변신해버렸습니다. 요새 나오는 금쪽이들은 제 발끝도 못 따라갔죠. 왜 그랬냐고요?


다음 주에는 친구들에게 최신형 아이리버 mp3를 보여주기로 했는데, 만약 주말에 mp3를 사러 가지 않는다면 저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 같았거든요. 친구들에게 무시당할 것 같아서 진짜 더 난리를 쳤던 것 같습니다.


결국 부모님께서는 중2병 환자를 치료하러 이마트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아이리버 최신형 mp3 플레이어를 구매했죠. 가격도 정확히 기억이 납니다. 297,000원이었거든요. 심지어 박스 뜯을 때 맡았던 새 제품의 냄새까지 생생히 기억납니다.


부모님께서 그 큰 목돈을 어떻게 마련하셨는지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냥 최신형 mp3 오너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지요. 주말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길 바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얼른 자랑하고 싶었거든요.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의기양양하게 최신형 mp3를 들고 학교에 갔죠.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mp3를 살포시 책상 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이제 절친들이 제 주위에 와서 "와 이게 최신형 mp3야? 대박!"이라고 놀랄 차례입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아무도 제 최신형 mp3에 관심이 없는 겁니다. 심지어 절친들도 쓱 보고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왜 내 mp3에 관심이 없지?


"지난주에 말한 그게 이거야"


결국 절친들에게 제가 먼저 자랑을 시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제가 지난주에 했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더라고요. 아주 간단하게 축하를 받았습니다. 그리곤 제 mp3는 몇 번 쓱 보더니 이내 다른 주제로 넘어가더라고요.


어? 이게 아닌데, 오늘만큼은 세상의 중심이 나여야 하는데? 왜냐면 나는 최신형 mp3 오너니까... 왜 나를 부러워하지 않지? 이러려고 내가 부모님 등골 빼먹은 게 아닌데..




<돈의 심리학>에는 정말 좋은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책이지요.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내가 가진 물건에 열광하는 건 나 자신뿐"이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다닐 때, 사람들은 '차'를 보지 '당신'을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죠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멋진 차와 좋은 시계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인가?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은 당신의 친절과 겸손을 통해 얻기 더 쉬울 것이다"


저 때 구입한 mp3 플레이어는 고장 날 때까지 정말 잘 썼습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후회가 자리 잡았죠.


떼써서 우리 집안의 가계를 망쳤다니, 친구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내가 우리 집을 힘들게 만들었다니.. 30만 원이 아니라 300만 원 치의 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뭔가 소비를 할 때면 저 mp3를 떠올립니다. 또 고통스럽게 후회하지 않으려고요. 제 자신에게 헛돈을 쓰는 건 이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저를 위한 멋진 차? 저를 빛내줄 멋진 시계? 생각만 해도 저에게는 고통입니다.


다만 이런 것에 돈을 쓸 때는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가족과 소중한 추억을 만드는 일, 소중한 사람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일, 지식을 쌓는 것과 같은 분야는 전혀 아깝지 않죠. 이런 데 쓰기 위해서 평소에 100원 200원 소중히 모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건하우절의 <돈의 심리학>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사진: UnsplashAksh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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