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나, <말 그릇>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성격이 급하셨습니다. 종종 안부전화를 드리면 항상 첫 마디는 이것이었죠. "무슨 일이야?" 아이스 브레이킹 같은 건 없습니다. 날씨가 어떻니 밥은 먹었니 안 궁금합니다. 용건만 간단히 묻고 끝내려고 하십니다.
길게 통화하고 싶으면 용건을 정확히 말씀드리면 됩니다. "용건은 안부입니다."라고 하면 그제서야 안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식사는 하셨는지, 거기 날씨는 어떤지 그러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성격은 그대로 아버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아들인 저에게도 전수되었지요. 용건만 간단히라는 녀석은 대를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주말, 제 전화가 울립니다. 오, 오랫만에 대학 동기한테 전화가 오네요! 거의 몇 년 만에 전화가 오는 것 같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받아 봅니다.
친구: 요~ 구구샘, 잘 지냈어?
구구샘: 와! 반갑다! 결혼해?
친구: 아이고, 성격 급한건 여전하네. 애기는 잘 크냐?
구구샘: 결혼식 날짜 나왔어?
친구: ..몇 월 며칠이야. 시간 되냐..?
구구샘: 당연히 되지, 달력에 적어 놓을게!
대학 동기가 몇 년 만에 전화를 걸었으면 대충 목적은 뻔합니다. 90프로 이상 결혼 청첩 전화죠. 제가 잘 지내는지 애기가 잘 크는지 궁금했으면 몇 년 전부터 진작 물어봤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좀 더 자세히 풀어 보자면
1) 나 말고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청첩 전화 돌려야 하는 상황일 것이다
2) 그러니 마음이 급할 것이다. 다른 준비할 것도 많다
3) 친구인 나라도 시간 줄여 줘야겠다
저의 이런 '용건이'를 마주한 친구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멋쩍어하고, 다른 하나는 고마워하죠.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딱히 제 스타일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더 소중한 건 우리의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놈의 용건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죠. 퇴근한 뒤에 이어지는 저희 부부의 대화를 한 번 보실까요?
아내: 오늘 이런 이런 어려움이 있었어
구구샘: (상담대학원 다녔던 짬을 살려 일단 듣는다)
아내: 그때 내가 행동A를 했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어
구구샘: (못참겠다)그땐 A보다 B가 더 낫지 않았을까
아내: (말문을 닫는다)
충조평판(중고, 조언, 평가, 판단) 4종세트는 금기라는 걸 알면서도 가까운 사람에게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제가 아내보다 경력이 쬐끔 더 많다 보니 업무를 좀 더 알거든요. 그래서 최적의 방안을 찾아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죠.
아내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요. 제가 해야할 것은 가만히 들어주기랍니다. 누구를 욕할 필요도 없고 개선사항을 말해줄 필요도 없대요. 그냥 들어주기만 하면 된대요.
남이면 그냥 들어줄 수 있습니다. '네 인생 네가 사는 건데, 알아서 해. 나는 이 자리에서 무한 경청과 공감만 할게. 충조평판 했다가 사이만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라고 생각하며 시간 버티면 끝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가족이잖아요? 다음에도 또 같은 선택을 하고 상처받으면 어떡해요? 조언을 절대 해 주면 안 돼요?
건물을 올릴 땐 기초공사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하층, 1층부터 탄탄하게 올려야 하죠. 1층도 없는데 3층을 올릴 순 없습니다. 건물을 공중에 띄울 수는 없으니까요.
책에서는 말도 건물처럼 빌드업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순서는 다음과 같대요.
1) 일단 듣기
상대의 말을 일단 다 듣기. 그리고 감정이나 판단을 넣지 않고 그대로 되말하기.
2) 공감하기
마음 어루만져 주기
3) 그리고 충조평판
그렇다고 상대가 조언을 다 수용할 거라고 기대X
아내가 말문을 닫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저 순서를 지키지 않았거든요. 그놈의 용건이가 튀어나와서 1번과 2번을 생략해 버렸습니다. 냅다 3번을 들이미니 아내가 수용할 수 있나요?
제가 아내에게 해준 조언은 대체로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내도 그건 인정합니다. 교직경력으로도 제가 더 선배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결과가 눈에 보여도 다짜고짜 들이미는 충조평판은 싫을 것 같습니다.
책의 제목인 말그릇에 비빔밥을 넣어 먹어 볼까요?
A: 밥 깔고 나물 올림
B: 나물 깔고 밥 올림
들어간 재료는 똑같아도 먹음직스러운 정도는 다를 것 같습니다. 단지 순서만 바뀌었을 뿐인데도요.
용건아, 너 좀 쉬어야겠다. 들어가 있어.
김윤나 작가의 <말 그릇>을 읽고 작성했습니다.
사진: Unsplash의Nikolay Sm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