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 <나를 지키는 생존법률>
장면 1.
"우리 아빠 경찰이거든!"
같이 놀던 친구가 으스대며 말했다. 그것도 그냥 경찰이 아니란다. 무려 형사님이란다. 형사님이라면 가죽잠바 입고 나쁜 사람들 잡으러 다니는 분 아닌가? 꼬맹이었던 나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 나도 커서 형사가 되고 싶었다.
장면 2.
[장래희망: 판검사]
내 초등학교 졸업앨범에 그렇게 적혀있다. 지금도 장래희망을 적던 6학년 교실 안의 풍경이 생생하다. 그날까지도 나는 판검사가 하나의 낱말인 줄 알았다. '판사+ 검사' = '판검사'라는 사실을 중학교에 가서야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졸업앨범에 그렇게 적었냐고? 그야 부모님께서...
장면 3.
"혹시 주변에 법 좀 아는 사람 있어?"
살면서 억울한 일은 꼭 생긴다. 그럴 때 우리는 법을 찾는다. 그런데 어쩌나, 법은 너무 어렵다. 평소에 자주 쓰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걸 쉽게 풀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게 변호사다.
1+2+3
그런데 세상에 정말 웃긴 직업이 하나 있다. 저 모든 직업을 하나로 모은 거다. 그건 바로 '교사'다. 교사는 말 그대로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식 전달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교사가 수업만큼 에너지를 쏟는 건 바로 갈등 중재다. 교실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씩 알아보자.
1. 경찰입니다만
"선생님, 쟤가 저 쳤어요!"
사건을 접수했다. 목격자를 찾는다. 손바닥만한 셜록홈즈 메모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사건의 윤곽이 잡혔으면 양쪽을 불러 입장을 듣는다. 검사님이 이해하기 쉽게 모든 과정을 문서로 남기는 건 덤이다.
2. 검사입니다만
형사님께서 예쁘게 정리해 주신 기록이 검사에게 넘어왔다. 물론 그 형사도 나고, 검사도 나다.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넘겨주면 된다는 뜻이다. 이제 사건의 심각성을 판단할 차례다.
학생 A: 다리를 쭉 빼고 의자에 앉아 있었음
학생 B: 그 다리에 걸려 넘어짐. 많이 아프다고 함. 평소에 A에게 맺힌 게 많았음. 방금 이거 학폭 아니냐고 따짐
'기분 나쁘면 다 학폭인가?'
불충한 생각이 살짝 올라왔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검사님도 법률을 중시하는 것처럼 교사도 매뉴얼을 중시하면 된다. 공무원은 규정으로 먹고사는 존재다. 암튼 한쪽이 학폭 열어달라고 했으니, 다음 스텝으로 가면 된다.
3. 변호사입니다만
가해자, 피해자라는 말도 쓰면 안 된다. 왜냐면 두 학생 모두 귀여운 내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00 추정 학생'이라는 아름다운 낱말을 쓰자. 매뉴얼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나는 형사로 커리어를 시작해 검사를 거쳐 변호사가 되었다. T의 영역에서 F의 영역으로 넘어왔다는 뜻이다. 각 학생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 하는 건 기본이다. 여기에 양쪽 보호자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야 한다. 모두 민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이때부터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야 한다. 어느 쪽도 편들면 안 되고, 축소나 은폐한다는 오해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데, 괜히 변호사를 전문직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이거 어설프게 했다간 일 커지는 거 순식간이다.
4. 판사입니다만
교실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모두 학폭으로 넘어가는 건 아니다. 사소한 다툼 정도는 즉석에서 해결하면 된다. 그때 교사는 판사가 되는 거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공평'이다. 학생들의 평소 행실을 고려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냥 이 사건 하나만 바라봐야 한다. 최고 에이스 모범생이라도 이번 케이스에서 잘못을 했다면 정의를 배달해야 한다. 그거 대충 넘어갔다간 사법부의 권위는 바닥으로 처박힌다. 신뢰가 사라진 교실은 무법천지가 된다.
형사, 판검사, 변호사님들은 아쉬울지도 모른다. 법으로 정해진 역할만 맡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교사는 다르다. 형사 + 판검사 + 변호사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꽹과리까지 울릴 수 있다는 뜻이다. 부럽징?
이 책, <나를 지키는 생존법률>은 변호사가 썼다. 이 책엔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법률 갈등 100가지가 적혀있다. 하지만 나는 우물, 아니 교실 안 전문직이다. 형사, 판검사, 변호사 커리어는 우리 반 안에서나 통한다. 필드로 나오면 나는 '법찔이'일뿐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진짜 변호사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물론 이 서비스는 무료가 아니다. 일단 사건을 맡아달라고 의뢰하는 착수금(수임료)은 통상 500만 원 내외란다. 부가세는 당연히 별도일 거고. 거의 내 두 달치 월급을 들이부어야 한다.
게다가 승소금이 나오면? 보통 10% 내외의 인센티브를 변호사에게 줘야 한단다. 그것도 처음 계약할 때 문구를 잘 써야 한다나? '승소 시 10%'라고 해버리면 난감할 수 있단다. 패소 측에서 입금을 안 해주는 경우, 사비로 변호사에게 10%를 추가로 줘야 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승소금 입금 시'라고 문구를 써놓아야 한다나 뭐라나.
책에선 나쁜 변호사 거르는 방법도 알려준다.
1. "소송하면 100% 이깁니다."라고 하는 변호사
2. 본인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사무장만 내보내는 변호사
3. 소송 진행상황 공유 안 해주는 변호사
550만 원에 이런 서비스가.. 있다? 없다?!
아이들의 다툼은 승자도 패자도 없다. 가운데서 서비스를 제공한 교사가 550만 원을 더 버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의미 없는 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오늘도 교실에서 갈등 조율 방법을 연습한다.
그래서 아직, 학교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