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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뱀, 코끼리, 모자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by 알뜰살뜰 구구샘

‘보아뱀, 코끼리, 모자’


뭐가 떠오르나요? 네, 맞습니다. 어린왕자입니다. 대부분 아실 거예요. 저도 어릴 때 읽어봤습니다. 그래서 다 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도 모르더라고요.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저 세 가지 뿐이었습니다. 보아뱀과 코끼리, 그리고 모자였죠.


걔네들은 초반부에 등장합니다. 그 뒤에도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해요. 하지만 저는 저까지만 알았습니다. 그래 놓고 어린왕자를 섭렵했다고 생각했어요.


‘집합’만 풀고 ‘수학의 정석’을 마스터했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이 책을 처음 읽은 겁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걸 읽게 됐냐고요?



2학기 개학식 날이었습니다. 요즘은 보통 방송조회를 합니다. tv에 교장선생님이 등장하셨습니다. 훈화말씀을 하시는데, 손에 뭐가 들려 있네요?


<<어린왕자>>


20년 전에 산 책이랍니다. 그걸 갖고 계시대요. 좋은 책이라 학생들에게도 추천한답니다. 꼭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죠.


보스가 추천한 책, 한 번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마침 교육과정 진도도 딱 맞았어요. 국어책에 처음 나오는 게 독서단원이었거든요.


책도 문제없었습니다. ‘크레마 북클럽’이라고, 무료 전자책을 읽을 수 있었거든요. 기계는 어떡하냐고요? 작년에 모든 학생에게 노트북이 제공됐습니다.. 물리적인 조건은 모두 갖추었었죠. 실행만 하면 됐습니다.


일단 저부터 읽었습니다. 그래야 가르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정말 재밌는 겁니다. 왜 명작인지 알겠더군요. 다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거, 어른을 위한 동화인데?'


초등학생을 위한 책인 줄 알았습니다. 유치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어른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더라고요.



소설의 등장인물은 크게 두 명입니다. 하나는 어린왕자고, 다른 하나는 비행기 조종사죠. 둘은 사실상 동일인입니다. 시간만 다를 뿐이죠. 어렸을 때의 자신과, 어른이 된 후의 자신요.


애니메이션 '업'이 떠올랐습니다. 그것도 플롯이 대충 비슷해요. 나이 든 할아버지 앞에 스카우트 단원복을 입은 아이가 등장합니다. 말도 안 되는 모험을 하죠. 다 끝나고 나면 압니다. 그 아이가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이라는 사실을요.


어린왕자, 비행사에게 이것저것 요구가 많습니다. 특히 그림을 많이 요구하죠. 돈도 한 푼 안 내면서 바라는 것도 많습니다. 취향은 얼마나 까다로운지, '이거 아니야, 다시 그려 줘'도 자주 시전하죠.


비행사는 왠지 모르게 쩔쩔맵니다. 그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줍니다. 그리고 어린왕자의 마지막 곁을 지켜줍니다. 그가 떠난 후에도 하늘을 보며 추억을 회상합니다.


'그리운 것은 그대일까, 그때일까?'


비행사가 그리워한 것은 어린왕자일까요? 아니면 순수했던 자신의 과거일까요?



만약 제 눈앞에 '어린 나'가 나타나면 어떨까요? 그가 제 머릿속을 다 볼 수 있다면? '생계, 저축, 대출, DSR, LTV...'등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보며, 그 친구는 무슨 말을 해줄까요?


어린왕자가 좋아하는 것은 자연 그대로의 것들입니다. '노을, 장미, 여우' 같은 거죠. 하지만 저에게는 사치입니다. 팔자 좋게 그런 걸 만끽할 시간이 없어요. 러닝머신 위에서 가만히 있으면 바로 엉덩방아 각입니다. 걸어도 현상유지고, 뛰어야 겨우 앞으로 가요.


그런 저를 어린왕자가 측은하게 바라봅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뒤통수가 따가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니까요.


"그럼 노을 정도는 볼 수 있지 않아?"


그도 타협했습니다. 저도 이 정도는 동의할 수 있어요. 크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오늘 저녁은 해 넘어가는 걸 봐야겠습니다. 핸드폰은 놔두고요.



사진: Unsplash의Jack Finni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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