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쉬어도 쉬는 게 아닙니다. 마음 한편이 불안합니다. 쉬는 날 넷플릭스를 봐도 찝찝합니다. 나만 노는 건가? 남들은 죄다 발전 중인가? 월화수목금금금이 됩니다. 그렇게 번아웃으로 스며듭니다.
우리 세대에게 번아웃은 익숙합니다. 인생의 동반자죠. 평생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왜냐고요? 수능과 모의고사를 쳐봤으니까요.
저도 수능 세대입니다. 당연히 매달 모의고사 쳤어요. 순위가 복도에 붙었습니다. 전교 1등부터 쫘르륵 붙었죠.
그걸로 자리도 바꿨습니다. 모의고사 친 다음 날, 모든 학생이 교실 뒤로 나가요. 1등부터 앉고 싶은 자리에 앉습니다. 양성 합반이었습니다. 짝을 고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선 예쁘고 잘생긴 건 통하지 않습니다. 성적이 깡패입니다. 전교 1등 옆자리는 누구나 탐냅니다.
저도 자리 먼저 고르고 싶었습니다. 복도에 붙은 이름을 위로 올리고 싶었어요. 근데 그게 쉽나요? 위에 있는 애들은 뭐 노나요?
잠을 더 줄이긴 힘들었습니다. 이미 한계였어요. 저도, 제 친구도 다 5시간만 잤습니다. 제 옆에 있는 애도 새벽 1시에 잡니다. 그리고 아침 6시에 일어나죠. 언제 자고 일어나는지 뻔히 다 보입니다. 모두 기숙사생이었으니까요.
수업 시간에 졸리면? 교실 뒤로 나갑니다. 서서 수업을 듣습니다. 혼자만 그러는 건 아닙니다. 친구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선생님도 당연하게 여기고요.
야자 시간에 졸리면? 복도로 나갑니다. 가슴까지 오는 사물함 위에 문제집을 올립니다. 서서 문제를 풉니다. 저만 그러는 거 아닙니다. 다른 애들도 다 서서 합니다.
언어영역 등급을 올리고 싶습니다. 시간을 더 투입합니다. 그러면 귀신 같이 수리와 외국어가 내려갑니다. ‘풍선 효과’가 이건가 싶습니다.
내려간 수리 등급을 올리려고 합니다. 시간을 더 투입합니다. 그러면 귀신 같이 언어가 내려갑니다. 아오!
어느새 다음 모의고사 시즌입니다. 성적표를 받아 듭니다. 지난번과 똑같습니다. 죽어라 공부한 것 같은데, 결과는 제자리입니다.
왜냐고요? 나만 열심히 한 게 아니잖아요. 남들은 뭐 노나요? 그들도 죽어라 합니다.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내신 시험일입니다. 중간고사 친 날은 기숙사 열람실도 안 엽니다. 전교생이 다 함께 쉽니다.
그땐 저도 친구도 모두 시내로 향했습니다. 남포동에서 떡볶이도 먹고, 노래방도 갔습니다. 그땐 죄책감이 안 들었습니다. 저만 노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그날도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소위 ‘넘사’라고 불리던 학생들이었죠. 루틴 깨진다고 놀지 않더군요. 전교 순위권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다들 이런 경험 있으시죠? 우리 모두 수능 쳤잖아요. 제가 3줄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1 우리는 모두 러닝머신 위에 있었다.
2 걸으면 제자리, 앞으로 나아가려면 죽어라 뛰어야 했다.
3 쉬면? 바로 뒤처진다. 모의고사 등급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밀레니얼 세대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모의고사 치고, 수능 봤죠.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했습니다. 줄 세워졌습니다. 등급으로 나뉘었습니다. 쉴 때 죄책감 팍팍 받으면서요.
이젠 어떨까요? 수능 쳤으니 끝일까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아직 미션이 남은 것 같아요. ‘군대 - 취업 - 결혼 - 내집마련 - 출산 - 육아 - 자기계발 - 성공 - 경제적 자유’… 수능은 티저 영상에 불과했습니다. 메인 미션은 따로 있었네요.
이 미션들, 큰 틀은 수능과 같습니다. 알게 모르게 등급이 있어요. 1등급부터 9등급까지요. 인스타, 유튜브, 호갱노노 같은 앱들이 한몫합니다.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보여주는 모의고사 성적표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젠 아무도 ‘종이 성적표’를 들이밀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죠. 매일 뼈저리게 느낍니다. ‘투명 성적표’가 있다는 사실을요.
이런 상황에서 느긋하게 쉴 수 있을까요? 다들 걷거나 뛰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래서 퍼집니다. 무리하면 지쳐요. 번아웃은 그렇게 찾아옵니다.
책에서는 우리 세대의 번아웃을 다룹니다. 미국의 예를 들었지만,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합니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구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자는 이걸 사회 구조의 문제로 돌립니다. 개인이 잘못한 게 아니래요.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답니다. 그래서 너무 자책하지 말래요.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조금 아쉽습니다.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떻게 할지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평소처럼 러닝머신 위에서 뛸지, 아니면 잠시 쉬어갈지요.
어쨌든,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했다.’는 겁니다. 교실에 있던 우리들, 전교 1등부터 끝 등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원하는 등급이든 아니든, 하루하루 집중했습니다.
이제 외부에서 발행하는 종이 성적표는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발행하는 성적표만 있을 뿐입니다. 이거, 어떻게 발행하든 제 마음입니다. 뭐라고 쓰든 상관없죠. 공문서 위조도 아니고, 사문서를 고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발행할 성적표에는 ‘올 1등급’이라고 적어야겠습니다. 어차피 저만 볼 거니 상관없습니다.
왜냐고요? 어떻게든 오늘 하루를 잘 살아냈으니까요.
사진: Unsplash의Thibault Pen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