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스마트폰 사진찍기>
제가 집은 책은 2014년 버전이었습니다. 4쇄 발행본이었죠. 심지어 풀컬러였습니다. 종이 품질도 정말 좋았어요. 얼마나 대단한 책이길래 이렇게나 많이 팔렸을까요? 기대와 함께 책장을 넘겼습니다.
플래시 켜는 법을 알려줍니다. 3X3 구도 가이드 선을 누르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1:1 비율로 할지, 4:3 비율로 할지 선택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이 정도면 거의 삼성전자 매뉴얼 수준입니다.
'이걸 이렇게까지?'
불손한 생각이 밀려옵니다. 아니, 그냥 이것저것 눌러보면 되는 거 아녜요? 폰 사면 다들 그러지 않나요? 심지어 앱 처음 켜면 말풍선도 뜨잖아요. 삼성전자 석박사님께서 고심해서 만든 그 가이드요. 그것만 따라 해도 기능을 익힐 수 있을 텐데요?
'운전 잘하는 법'이라는 책이 있다고 해볼게요. 제가 기대하는 건 이런 겁니다.
-후측방 경고시스템이 없는 차에서 숄더체크 잘하는 팁
-상향등 켜고 마주 오는 차가 있을 때 대처하는 방법
-고속 주행 중, 고라니가 도로로 뛰어들었을 때 대응하는 법
이런 내용이 있기를 바란 거죠. 그런데 책에서 주로 설명하는 건
-시동 거는 방법
-비상등 켜는 방법
-에어컨 켜는 방법
와 놔, 이건 매뉴얼에 다 나와있잖아요! 차 사면 공짜로 주는 그 매뉴얼요. 엄청 두꺼운 그 책자말입니다. 거기 다 적혀 있잖아요. 엔진오일 언제 갈아야 하는지, 타이밍벨트 언제 바꾸면 되는지도 다 적혀 있잖아요! 근데 그런 걸로 책을 낸다고요? 그게 4쇄 넘게 팔렸다고요? 와! 대박!
하지만 흥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제가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대중은 솔직합니다. 그들은 필요해서 샀습니다. 4쇄 발행이라는 증거가 있잖아요. 판매량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해 봅니다. 도대체 이 책의 매력이 뭘까요?
문득 저의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그 유명한 58년 개띠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피처폰을 고집하셨습니다. 버티고 버티다 결국 최근에 스마트폰으로 넘어오셨죠. 부품이 단종돼서 더 이상 수리를 할 수 없었거든요.
물론 안스마트(unsmart)하게 쓰셨습니다. 짜증부터 내셨어요. 전화는 어떻게 받아야 하냐, 왜 물리 버튼이 없냐. 타자는 어떻게 치란 말이냐. 이거 누르면 큰일 나는 거 아니냐.
나름 상담 좀 배웠다고, 어떻게든 공감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러나오진 않았어요. 솔직히 이해가 안 됐거든요. 와이파이 쓰는데, 데이터요금 나가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추가 데이터요금 안 나오게 유료서비스도 등록했는데, 전화도 무제한인데! 그냥 전화 걸고 문자 보내고 인터넷 이용하고, 마음껏 하시면 되는데! 왜 이렇게 망설이시는 걸까요? 일단 버튼 눌러보면 되잖아요.
저희 아버지만 이렇게 신중하신 건 아니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비슷했어요. 퇴근하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였습니다. 아버지 또래로 보이시는 어르신께서 저에게 말을 걸어왔죠.
"삼촌, 나 좀 도와줄 수 있나?"
"네?"
"여기 핸드폰 좀 봐주게."
순간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신종 사기인가 싶기도 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해외여행 가서 누가 사진 좀 찍어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카메라를 건넸대요. 하나, 둘, 셋! 찰칵! 셔터를 누르는 순간 카메라 밑부분이 쑥 빠지는 거죠. 부품이 땅바닥에 떨어져 부서집니다. 사기꾼들은 그걸 구실로 수리비를 요구한대요.
그래도 매정하게 거절할 순 없었습니다. 어르신의 눈빛이 간절했거든요. 웃으며 뭘 도와드리면 되는지 여쭈었습니다.
"주소록에 번호를 지우고 싶은데, 혹시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 수 있나?"
바로 알려드렸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다 가르쳐드렸어요. 메뉴 버튼을 누르는 방법, 꾹 눌러서 삭제하는 방법, 여러 개를 동시에 제거하는 방법까지 알려드렸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연거푸 고맙다고 하셨죠.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대구 월성동 현장 답사를 할 때였어요. 너무 목이 말라 아무 부동산에나 들어갔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물 한 잔 얻어먹었죠. 그런데 또 아버지 나이 또래로 보이는 사장님께서 또 스마트폰을 건네는 겁니다.
"삼촌,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나?"
"네?"
"내가 유튜브를 하루 종일 보는데, 세로로 보려니 화면이 너무 작네. 혹시 핸드폰에 꽉 차게 가로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물론 이것도 친절히 알려드렸습니다. 손가락을 위로 쓸어 올리면 화면이 가득 차고, 아래로 쓸어내리면 화면이 작아진다고 말씀드렸죠. 다른 방법도 가르쳐 드렸습니다. 삼성 폰에서 화면 전환을 하는 방법. 자동회전 옵션으로 해 놓으면 폰을 기울이기만 해도 된다는 것도 말이죠. 사장님께서는 정말 고맙다고 제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자식들한테 물어보면 자꾸 핀잔만 준대요. 그래서 저한테 물어봤답니다.(뜨끔)
부동산을 나오면서 저희 반 학생들을 떠올렸습니다. 그 친구들은 2013년생입니다. 스마트폰이 한국에 상륙한 게 2008년 정도였으니, 스마트폰이 점령한 세상에서 태어난 거죠.
학생들과 IT교육을 하면 거칠 게 없습니다. 와이파이는 추가요금이 없다는 거 몸으로 알거든요. 플립 폰 방향키 중간에 있던 [NATE]라는 파멸의 버튼도 모릅니다. 탭 해서 안 되면, 꾹 눌러도 보고, 두 손가락으로 쓸어도 보고, 온갖 버튼을 동시에 누르기도 합니다. 이 친구들은 겁이 없어요.
그래도 폰 안 망가진다는 거 알아요.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요. 아, 옛날에 스마트폰이 실제로 폭발했던 적도 있지만, 그땐 그들이 어린이집 다닐 때라서 아마 기억 못 할 겁니다.
이런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그거 누르신다고 세상 망하지 않아요! 제발 저한테 물어보기 전에 그냥 한번 눌러보세요. 스마트폰은 다들 그렇게 써요!"
그러던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사천항공우주박물관'에 갔습니다. 4살 딸이 특히 좋아했어요. 전시된 탱크 위에도 올라가고, 퇴역한 대통령 전용기에도 들어가 봤죠. 동선을 따라 도착한 곳은 어느 실내 전시장이었습니다. 그곳에 전투기가 하나 있었어요.
비행기 조종석 앞에 계단이 있었습니다. 파일럿처럼 사진을 찍어도 된대요. 딸이 자기도 앉혀달랍니다. 겨드랑이 밑에 두 손을 넣어 쏙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종사로 만들어줬죠. 그랬더니 조종간에 있는 버튼을 죄다 눌러보는 겁니다.
'이거 이렇게 막 눌러도 되나...'
물론 모형이라는 건 압니다. 미사일 안 나간다는 거 알아요. 비행기가 추락하지도 않습니다. 버튼 눌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빠도 그냥 한 번 눌러봐."
기장님께서 저를 호출했습니다. 순식간에 부기장이 되어야 했죠. 딸을 따라 버튼을 눌렀습니다. 매우 어색하게요. 뒤에서 교관의 호통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어이! 훈련병! 전투기에 누가 올라가랬어! 버튼에서 당장 손 떼!" 실체도 없는 찝찝함을 느끼며 기장님의 미션을 수행했습니다.
파일럿 놀이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뒤에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딸을 쏙 안아 그라운드로 내려줬습니다. 그때 문득 아버지와 어르신들이 떠올랐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한 번'이, 다른 누군가에겐 '두려움'일 수 있겠구나.
제가 전투기 조종석에서 느꼈던 감정을 스마트폰을 쥔 아버지께서 똑같이 느끼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익숙함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저와, 50년대 후반에 태어난 아버지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이 책을 쳐다봅니다. 저에게는 손쉬웠던 플래시 켜는 법,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미션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걸 풀컬러로 알려주는 이 책, 저희 아버지에게는 아들보다 정확하고 친절하겠네요.
아버지께서는 어느새 스마트폰과 친해지셨습니다. 음성으로 톡을 보낼 수도 있고, 은행 앱도 쓸 수 있습니다. 이번 추석엔 인터넷으로 쇼핑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이젠 짜증 내지 않고, 친절하게 알려드려야겠습니다.
사진: Unsplash의Moises de Pau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