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농문, <몰입>
판타지나 무협 소설은 통상 이 플롯을 따릅니다.
1. 주인공이 고난을 겪는다.
2.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3. 복수를 꿈꾸며 몸을 회복한다.
4. 낮은 곳에서 차근차근 레벨업한다.
5. 그러다 압도적으로 강한 적에게 쥐어 터진다.
당연히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잖아요. 그럴 리 없죠.
6. 기인(보통 숨은 고수)의 도움을 받는다.
7. 폐관수련에 들어간다. 그를 사부로 모신다.
8. 뒤통수 쥐어 박히며 수련한다(명상+기본기 다지기)
9. 각성하고 폐관수련 끝낸다.
10. 나와서 적들 뚜까 팬다. 세계관 최강자가 된다.
여기서 궁금한 게 생깁니다.
'아니 무슨 폐관수련 한 번 했다고 각성이 되나? 가부좌 틀고 폭포수 맞으며 생각만 주야장천 했다고 해서 레벨이 왜 올라? 밖에서 열심히 레벨업해야 하는 거 아녀? 이게 말이 돼?'
솔직히 다 뻥인 줄 알았습니다. 말 그대로 '판타지(Fantasy; 환상)'라서 가능한 줄 알았죠. 근데 그걸 진짜 현실에서 한 사람이 있다네요?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님이래요. 수십 년 전부터 몸소 실천하셨답니다. 결과로 증명한 거죠. 그리고 이 책, <몰입>을 내셨대요.
소설에선 폐관수련 시 혼자서 하지 않습니다. 옆에 사부님이 꼭 계세요. 공짜로 왜 가르쳐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이 딱히 예쁜 짓을 한 것 같지도 않거든요. 그냥 순수한 마음인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손주들 앞에서 지갑이 잘 열리는 느낌이랄까요?
영화 <타짜>에서도 그렇잖아요. 평경장이 고니를 거두는 장면이요. 군산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촬영된 그 장면 말입니다. 고니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했는데, 라이터 켜서 손바닥을 쫙 보더니 "넌 화투 치지 말라." 하면서 돌려보냈던 씬입니다. 물론 나중엔 제자로 거뒀죠. 그리고 고니는 '폐관수련'을 시작합니다. 계절이 바뀌도록 화투장만 만지죠.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입니다. 사부님이 하는 말을 모아놓은 것 같아요. 폐관수련에 들어간 제자를 위해서요. 하나씩 세세하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설득력이 있어요. 고도의 몰입 상태에 이르면 레벨업을 할 거랍니다. 다만, 내내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매일 1시간 이상 운동하세요.'
몰입은 뇌를 자극합니다. 팽팽 돌리고 나면 잠이 안 올 거래요. 침대에 누웠는데 눈이 말똥말똥할 수 있답니다. 각성 상태라서요. 자고 싶은데 못 잔다면? 불면증이죠. 이걸 방지하려면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운동이 필요하대요. 교수님 본인도 꾸준히 테니스를 친답니다. 열심히 쫓아다니다 보면 공에만 몰입하게 되고, 다 끝나면 개운하게 잘 수 있대요.
다시 판타지와 무협 소설로 돌아옵니다. 폐관수련할 때 사부님도 똑같은 걸 가르쳤습니다. 폭포수 아래에서 명상을 끝내면 꼭 운동을 시킵니다. 특히 보법을 중요하게 여겨서, 바닥에 발바닥 모양을 낸 뒤에 그걸 따라가라고 하죠. 처음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기이한 자세로 몸을 꺾어야 가능하거든요. 땀이 뻘뻘 납니다. 하지만 꾸준히 반복하면 이내 성공하죠. 소설에선 짧게 묘사하지만, 몇 개월에서 몇 년은 그것만 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이 지루함을 어떻게 견딘 거야..)
아무튼, 폐관수련에서 레벨업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사부님이 특히 강조하는 건 이 두 개죠.
1. 폭포수 명상(몰입)
2. 보법 익히기(운동)
사부님도, 서울대 교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럼 굳이 안 해볼 이유가 없습니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어요. 한번 해보는 거죠. 저도 따라 해 보기로 했습니다. 매일 운동하고, 시간 내서 몰입하는 거요.
아참, 책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쥐뿔도 없는데 몰입해 봤자 소용없대요. 기초는 닦아 놓아야 한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순 없대요.
프린터기로 예를 들어 볼까요? 카트리지에 3색 물감이 들어있긴 해야 합니다. 그걸 요리조리 조합해서 멋진 그림을 만들 순 있죠.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텅 비어있다면? 챗GPT 할아버지를 갖다 부어도 흰 종이만 나옵니다. 물감 자체가 없으니까요.
흠, 그러고 보면 판타지와 무협소설이 은근 자기 계발서입니다. 주인공이 자기 계발로 성공하는 휴먼스토리네요. 그래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가 그렇게나 많이 읽힌 걸까요?
사진: Unsplash의Anway Pa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