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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구 씨인데, 자식은 유 씨라고?

김명교, <아, 이런 말이구나! 문해력의 기쁨>

by 알뜰살뜰 구구샘

일동, 묵념.


복도를 봅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한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죠. 장례식장이냐고요? 아니면 현충원? 그것도 아니면 군대 내무반 점호 풍경일까요? 아닙니다. 이곳은 바로 초등학교 복도입니다.


뭘 보냐고요? 아이들의 시선은 전부 스마트폰을 향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튜브죠. 마인크래프트, 로블록스, 먹방, FPS(총쏘기 게임) 등 장르도 다양합니다.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확인했어요. 자기 계발 유튜브 같은 건 없더군요.


학교에서 스마트폰이 웬 말이냐고요? 그러게요. 저도 속이 터집니다. 학교 규칙에 버젓이 나와 있어요. 등교 후 전자기기는 'OFF'가 원칙이거든요. 진동이나 무음모드도 안 됩니다. 무조건 꺼야 해요. 그런데 현실은? 에이, 다들 아시면서. 물론 수업시간에는 가차 없습니다. 제가 개입할 거예요. 하지만 방과 후에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순전히 아이들의 의지에 따라야 합니다.


학교가 교육의 기능을 잃어버렸답니다. 혹자는 보육기관으로 전락한 것 같다고 하기도 하죠. 현실은 더한 것 같습니다. 사실상 유튜버가 보육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하루 종일 유튜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등교할 때에도, 방과 후 교실 기다릴 때에도, 학원 갈 때도 말이죠. 사실상 주 양육자의 목소리보다 유튜버의 목소리가 더 친숙할 겁니다. 물론 교사 목소리는 게임도 안 되죠.



그래도 담임입니다.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었습니다. 책을 권했죠. 스마트폰보다는 훨씬 몸에 좋고 맛도 좋으니까요. 하지만 반응은 미적지근합니다. 아이들, 원래 책을 싫어하는 걸까요?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예요?


실험해 봤습니다. 수업 시간에 책을 읽어줬어요. 초등 4학년 국어 교과서에 <젓가락 달인>이라는 소설이 나옵니다. 꽤나 두꺼운 책인데 일부만 실려 있어요. 저는 결심했습니다. 이걸 원문으로 읽어주기로요. yes24에서 원본을 샀습니다. 모두 120쪽이네요. 책을 tv 화면에 실시간으로 띄웠습니다. 그리고 읽었죠.


나름 똥을 쌌습니다. 동화 구연 하듯 목소리를 바꿨어요. 애니메이션 <신병>으로 유명한 장삐쭈님을 벤치마킹했죠. 엄마는 간드러지게, 아빠는 수염 난 것처럼, 아이는 익살맞게, 할아버지는 틀니가 곧 빠질 것처럼 읽었습니다. 그래도 별 기대는 안 했어요. 학생들,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잖아요. 어떻게 책이 폰을 이기겠어요?


1/3쯤 읽었습니다. 딱 40분이 지났더군요. 고개를 듭니다. 이제 멈춰야죠. 쉬는 시간이니까요. 그런데 웬 걸요? 아이들 눈빛이 야수인 겁니다. 눈에서 불이 나오더군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지금 끊으면 죽여버린다. 더 읽어라.'


흠흠, 그래도 명색이 담임인데, 주눅 들 순 없습니다. 짐짓 태연한 척을 했죠.


"자, 이제 쉬는 시간이네요. 화장실 갈 사람 다녀오세요."

"선생님! 쉬는 시간 없이 계속 읽어주시면 안 돼요?"


믿을 수 없는 소리였습니다. 쉬는 시간을 없애다뇨? 두 눈을 아니, 두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거 실화인가요? 이게 가능해요? 제가 스마트폰을 이긴 거예요? 유튜버를요?


120분 걸렸습니다. 120쪽 끝까지 읽어주는 데 말이죠. 초등학교 수업은 한 차시에 40분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3차시를 연달아 읽은 거죠. 아이들은 내내 집중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종이 치면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죠. 본인들도 느꼈을 겁니다. 얼마나 몰입했는지를요.


이제 학생 차례입니다. 교과서에 있는 물음을 해결해야 해요. 이땐 제가 딱히 할 게 없습니다. 그냥 순회지도 하면 되거든요. 학생 책상을 둘러보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뭐야, 책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잖아? 어떻게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좋아할 수 있지?' 그리고 결론을 내렸죠. 대부분의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는 걸요.



이 책, <문해력의 기쁨>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15년 동안 교육 전문 기자로 활약하신 분이 지으셨어요. 아들과 책으로 한바탕 놀아본 경험이 한가득입니다. 각종 꿀팁도 가득하죠. 네 살 딸을 키우는 저에게도 꼭 필요한 내용이었습니다. 책 귀퉁이 접느라 고생했네요.


다음 날, 한 학생에게 질문했습니다. 방과 후 복도에서 책을 보는 학생도 있었거든요. 그 친구에게 물어봤죠. 집에서 책 보냐고요. 그러니 활짝 웃으며 대답합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보호자께서 책을 읽어준대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다닐 땐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셨답니다. 초등학교 중학년이 된 이후론 토의토론을 한대요. 책 읽을 때마다요.


이걸 종합해 보면 공식이 나옵니다.

1. 대부분의 아이는 책을 좋아한다.

2. 양육자의 행동에 따라 달라질 수도

3. 유튜브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유 선생님', 유튜브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 있다는 걸 표현한 말이죠. 여기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선생님의 성씨입니다. 강릉 유 씨인지, 거창 유 씨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제 성씨와는 달라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삐끗했다간 자식 성씨를 빼앗길 판입니다. 유 선생님께 제 자식을 맡기면 당장은 편할 겁니다. 하지만 먼 훗날 정의의 철퇴가 내려지겠죠? 그게 싫으면 엉덩이를 떼야합니다. 스마트폰 말고 책을 보여줘야죠. 누군가 그랬잖아요. 육아는 귀찮음과의 싸움이라고요.


네 자식은 네 살이니 가능한 거 아니냐고요? 이미 늦은 것 아니냐고요? 절대 아닙니다. 이 책에 나와 있어요. 김 선생님도, 이선생님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냥 눈 딱 감고 따라 해 보세요. 신세계가 펼쳐질 거예요!



사진: Unsplash의Ben Robb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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