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것 말곤 답이 없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몰라요

by 윤서A

택시를 타고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까지 오는 20여 분간 나는 하루아침에 나를 지옥에 빠트린 (개자식) 건물주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처음 전화는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가 자동응답으로 넘어갔고, 두 번째 전화는 대여섯 번 울리자마자 자동응답으로 넘어갔다. 이건 수신 거절 버튼을 누른 거다. 세 번 네 번 전화를 계속했지만 받지 않았다. 다급하게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법원에서 파산 안내문이 왔던데 그럼 제 전세금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토록 유순한 문자 메시지라니. 나중에 알았지만 다른 세입자 중 나처럼 저렇게 '착하게' 말을 꺼낸 사람은 없는 듯했다. 당연히 답장은 오지 않았다.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 문턱에 들어서려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내 인생은 어디로 향하게 되는 걸까. 땅을 밟고 서 있는데 블랙홀 한가운데 있는 듯 온몸이 꺼질 것 같았다. 센터 안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 몇몇이 상담을 받고 있었다.


"전세계약서는 가지고 오셨나요?"


센터 직원은 우선 계약서를 봐야 나에게 맞는 상담을 법무사에게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회생법원에서 날아든 종이 3장만 갖고 무작정 택시를 탄 나는 전세계약서, 그러니까 2년6개월 전 작성한 전세계약서가 어디 있을지 잠시 생각해 봤다. '서랍 어딘가에 있겠지' 중요한 건 지금 내 손에 없다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어 저장해 둔 게 기억났다. 스마트폰 갤러리를 열고 스크롤을 마구마구 내렸다. 직원은 서두를 것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나는 5초 안으로 전세계약서 사진을 찾아야 일이 해결되기라도 할 것처럼 서둘렀다. 여행 가서 찍은 사진과 맛있는 음식 사진, 친구들과 찍은 셀카 사진을 주르륵 지나쳤다. 삶이 다하기 전 그 사람의 생이 주마등처럼 스친다던데, 나는 행복한 기억이 가득한 사진첩 사진들을 주마등처럼 흘려보내고 오직 전세계약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스크롤했다.


드디어 전세계약서 사진을 찾았을 때, 잠깐의 기쁨을 느꼈다. 1분이 멀다 하고 웃음이 터지는 내가 그날은 40분 만에 웃었다고 해야 할까. 40분간 마흔 번 웃어야 하는데 1번 웃었다. 서른아홉 번 웃지 못한 만큼 세월이 지나간 것 같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법무사 앞에 앉았다.


"기다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겠는데요."

전세계약서와 파산 안내문을 본 법무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전세사기를 당한 것이 맞아 보이고, 주소지로 부동산 등기를 떼보니 내 전세계약일자보다 선행된 담보대출이 있으며, 이 때문에 돈이 없다고 파산 신청을 한 집주인은 건물을 팔기 전까지 돌려줄 전세금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설령 건물을 판다고 해도, 은행빚을 갚고 나면 전세보증금으로 돌려줄 돈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낮다고 했다. 다시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럼 제 보증금은 어떡하죠?"

법률 용어가 섞인 자문이 돌아왔다. 최우선 변제금이란 게 있다. 담보대출이 설정된 연도를 기준으로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최소한의 보증금은 보장해 준다는 건데, 전세금이 5000만 원 이하여야 한다. 담보대출이 201X년 이뤄졌으니...2000만 원은 보장받는다. 나머지 금액은 경매에 넘어가 봐야 알 수 있다.


"그럼 나머지 3000만 원은요?"

법무사는 확답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상황이 조금 나으신 편이에요. 최우선 변제금 기준에 속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출근길에 나섰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무기력하고 미치게 만들 줄은 미처 예상 못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티끌만 한 존재라는 걸 일찍이 제주도 협재해수욕장에서 깨달았지만, 이 경우는 그것과 다르다. 우주의 먼지보다 불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위기가 닥쳤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답답함. 웬만한 일에 초연한 나조차 그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회사에 도착하니 소식을 들은 동료들이 나를 불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지만,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니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걱정 어린 얼굴들을 보는데 느닷없이 실소가 터져 나왔다. 힘들 때 웃는 건 일류라더니. 왜 하필 지금인 걸까. 아니면 아주 짧은 순간에 드디어 미친 걸까?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동료들만 봤을 것이다. 나는 내 얼굴 근육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게요. 제가 전세사기를 당했네요."


부장님은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가길 원했다. 순순히 따랐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지금 아무것도 안 하면 어때. 지금 당장 지구가 망한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아, 근데 경찰에 신고는 했니?"

아차, 싶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연락두절인 집주인은 보나 마나 사기치고 잠적한 건데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그 단순한 일을 까먹고 있던 것이다. 재빨리 신고를 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알렸다. 그랬더니 할 수 있는 일이 또 생각났다. 부동산을 중개해 준 그 공인중개사. 이렇게 될 걸 알았는지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아, 저도 아까 통화를 했는데요. 사정을 들어보니..."

통화를 했다고? 내 전화는 받지도 않고 콜백도 없는데? 심장이 뛰었지만 차분히 들었다. 몇 년 전부터 일자리를 잃고 수입이 없었다는 이야기. 금리가 높아지자 결국 은행빚을 갚지 못해 카드 돌려 막기 등으로 연명하다가 이 지경까지 왔다는 이야기. 사람은 성실한 사람인데 이렇게 벼랑 끝에 몰렸다는 이야기. 지금 건물 매수자를 알아보고 있으니 제값에 팔리기만 해도 전세금은 걱정 없을 거란 이야기.


한참 나중에서야 나는 그가 한 말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역시 그 사람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으로서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질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임을 깨달았다. 위로보다는 내뱉기에 가까운 임기응변. 그런데 그때는 '제값에 팔리기만 하면 전세금은 걱정 없을 거예요' 이 말이 유일한 동아줄 같았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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