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O호 님, 확정일자 언제세요?"

한자리에 모인 세입자들

by 윤서A

집에서 변호사 상담을 예약하고, 대한법률구조공단 무료 상담도 예약하고, 전세사기 피해자가 모인 오픈톡에 들어가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동안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됐다. 언제나 조용하던 복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아마 이제 퇴근해 상황 파악한 세입자 몇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저들은 곧 내 집에도 초인종을 누를 거라 예상했고, 그 예상은 1분 내로 적중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모여 있는 3명. 여기서 2년 가까이 사는 동안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들이다.


우리는 간단한 통성명도 할 필요가 없었다. "몇 호세요?" "OOO호요." 나도 저 사람도 우리는 앞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그 이후에도, 이름 대신 OOO호 님으로 불리고 부르면 그뿐이다.


내가 살던 건물은 7층짜리였고, 나는 5층에 살았다. 층마다 O개 호실이 있었고 몇 집이 공실이고 몇 집이 최근 이사를 오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내가 입주할 때만 해도 가장 넓은 평수인 7층에 건물주와 가족이 살았는데(그건 내가 안심하고 계약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올봄에 이사가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단다. 하긴 회생법원에서 온 파산 안내문에 보면 건물주는 초봄부터 파산 신청을 준비했다. 이사도 그쯤 나갔겠지. 누군가 같은 건물 꼭대기층에서 치밀하게 남의 인생을 망칠 준비를 하는 동안 아래층에 살던 나와 세입자들은 평범한 일상을 보냈던 거였다. 소름이 끼쳤다. 누가 돈을 미워하고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던가. 사람은 이토록 치밀하고 소름끼치게 이기적일 수 있다.


한두 명이 층마다 초인종을 눌러 세입자들을 한 집에 불러모았다.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한 세입자는 들어오자마자 눈물부터 흘렸다. "내가 올초부터 방 뺀다고 돈 달랬는데 조금만 기다리라더니 이 지경이 됐어요." 다른 세입자도 덧붙였다. "전 작년 연말 이사했는데도 보증금 달라니까 계속 기다려 달라고만 하더라고요."


다시 두통이 재발했다. 최소 작년부터 사건이 터질 기미가 있었는데도 나는 전혀 모르고 살았구나. 또 한 번 죄책감이 밀려왔다. 퇴근하고 이제 막 상황이 파악된 사람부터 이미 경찰 신고와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신청을 마친 사람까지. 모두가 충격 받긴 마찬가지였다. 몇몇이 집주인을 향해 심한 욕설을 했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바뀌는 건 없었다. 단체 고소장 접수부터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경매 넘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거밖엔 답이 없어요. 경찰 신고해도 돈이 없어 파산 신청했는데 돈 나올 구멍 없을 겁니다."


집주인이 살던 7층에 거주 중인 세입자가 차분히 말했다. 그는 집주인과 안면이 있던 사이로, 올봄 월세로 입주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의 말투가 너무 차분해서, 감정이 격앙된 일부 세입자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지금 월세라고 피해볼 돈 없어서 남일처럼 말하는 건가요?" 한 세입자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게 아니라 진짜 답이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나도 속상해요." 공동 대응을 모색하기도 전에 어딘가 균열이 생긴 느낌이었다. 흥분한 상태의 세입자와 그렇지 않은 세입자. 이 일에서 조금이라도 담담하면 전세사기범과 공범이 될 기세였다. 당연히 나도 화가 나지만, 날것 상태의 인간 감정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밥이 넘어간다'고 해서 그렇지 않다고 해서 서로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봤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전세금 회수이지 소모적 논쟁은 불필요했다. 이래봤자 해결될 게 없다는 것도 확실했고.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친목도모를 할 건 아니지 않은가. 잠적해버린 집주인 빼고는 서로의 처지가 묘하게 이해되면서도 이해하기 싫은,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머리와 가슴을 마구 지나갔다.


"확정일자가 다들 어떻게 되시죠?"


다른 세입자가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씩 전입일자와 확정일자를 말하기 시작했고, 다른 몇몇도 스마트폰에 날짜를 입력했다. 나는 이 상황에서 갑자기 그게 왜 중요한지 처음에 잘 몰랐지만 덩달아 메모 행렬에 동참했다. 20여 명의 세입자 중 내 확정일자는 12번째쯤 됐다. 앞순위가 아니다보니 갑자기 조바심이 생겼다.

나중에 알아보니, '다가구' 건물이 경매로 넘어갈 경우 확정일자 순번에 따라 돈이 배당되는 법이 있다고 했다. 내가 살던 건물은 '다세대'여서 확정일자와는 관계 없이 전세 비율대로 배당되는 경우였는데, 만일을 대비해 자신의 배당순위를 파악하고자 질문한 듯했다. 우리는 피해자 연대이기도 하면서 배당금을 놓고 싸워야 할 처지일 뻔한 것이다.


공동대응을 위한 오픈카톡방을 만들고, 우선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우선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에 피해자 지원 신청을 하는 것부터가 급했다. 피해자로 인정받기까지는 한 달가량 걸리고, 그마저도 인정되지 않으면 당장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차치해도 여러 가지로 추후 상황에서 불리할 게 뻔했다. 그리고 경찰에 단체로 고소하기로 합의했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보는 것으로 협의했다. 세입자 한 명이 내일 법원에 가서 건물주가 대체 무슨 이유로 파산했는지 기록을 열람해 공유해주겠다고 했다. 큰 위기가 왔지만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기도 했다. 왠지 우리만 똘똘 뭉치면 건물주가 숨겨놨을지 모를 돈을 회수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는 희망까지 생겼다.


하지만 우리는 전장을 누비며 피보다 진한 동료애를 쌓은 동지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전세피해가 발생한 건물에 함께 입주해 있는 같은 처지의 사람일 뿐이었다. 같은 처지라고 해서 각자의 사정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고, 이해하려 하지지도 않았다. '보증금 회수'라는 매우 당연하지만 이제는 막연해진 그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억지로 엮여버린 사람들일 뿐이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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