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말들
우선 '내가 전세사기 피해자입니다'를 입증할 수 있는 다양한 서류부터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정부에서 시행 중인 월세 지원이니 대출금 이자 면제니 등 이런저런 지원을 받을 대상이 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앞으로 어떻게 될 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나의 이름과 함께 '전세사기 피해자'라는 공식 인증이 필요했다.
닷새간 변호사 사무실 두 번 정도를 찾아갔고, 전화로 일정 금액을 내면 법률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로톡 서비스도 받았다. 법률구조공단에서 받을 수 있는 무료상담은 예약이 꽉 차서 가장 빠른 예약 일자가 보름 뒤였다. 하지만 서너 번의 유무선 상담으로도 뾰족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예정에 없던 상담비를 지출하고 나니 속이 더 쓰라렸다. 상담받으려고 급하게 연차도 며칠 냈으니, 그것 또한 모두 지출에 속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신청부터 서둘러야 했다. 준비해야 할 서류도 많았다. 임대차계약서는 물론 주민등록등본 초본, 임대인의 파산선고 결정문, 그리고 신청서 등.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서류를 최대한 챙기고 신청서는 현장에서 작성하기로 했다. 신청서에는 생각보다 써야 할 항목이 많았다.
'임대인의 수사개시 또는 임대인의 기망 등 임대인이 임차보증금반환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할 의도가 있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할 이유'
막힘 없이 쓰던 펜이 잠시 멈췄다. 이건 생각지 못한 질문(?)이다. 세입자들 몰래 파산 신청을 하고, 그 결정문이 세입자들에게 도달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는 이 집주인의 행위 자체가 기망이 아닌지? 법원에서 도착한 서류만으로 가해자의 사기를 입증할 수 없다니. 이보다 명백한 증거가 또 어딨을까?
그 항목의 공백은 내게 가해자가 사기 친 이유와 내가 사기당한 이유를 동시에 증명하라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들고 있던 펜을 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나처럼 신청서를 쓰는 사람들 서너 명 역시 그 증명의 공백을 메우려 기억을 더듬고 있는 듯했다.
내가 사기당한 증거를 쓰라고 하면 A4 한 페이지를 넘길 만큼 길게 쓸 수는 있다. 세입자들과의 모임에서 나는 임대인이 얼마나 치밀하게 보증금을 떼먹으려고 준비했는지 알게 됐다. 법원에 그가 낸 파산-회생 신청서를 통해 그가 수년 전부터 일용직을 전전하며 별다른 수입이 없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기간 그가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골프 해외여행을 일삼던 사치의 나날도 정확히 보았다. 20억 원이 넘는 세입자들의 보증금을 까먹으며 그가 무책임하고 방탕하게 인생을 즐길 동안, 나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을 뿐이다.
나를 비롯한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억대의 보증금을 하루아침에 담보 잡힌 청춘들이다. 목돈을 언제 얼마큼 회수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더러 그 돈을 왜 잃었으며 임대인이 그 돈을 '갈취'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직접 쓰라는 건 잔인했다. 생각해 보면 수많은 법률 자문에서도, 이후 경찰 고소장을 쓸 때도 나는 '내가 피해자가 된 이유'를 직접 증명해야 했다. 그가 대책 없이 내 보증금을 까먹으며 인생을 즐기는 동안 나는 아등바등 현실을 살아내느라 멍청하게 몰랐고,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노라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글과 말로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그 과정은 비록 절차상 필수적이었지만 개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우울해서 숨이 안 쉬어져요.'
세입자 단톡방에서 누군가 저 말을 꺼냈을 때, 갑자기 나도 공황장애가 온 듯 가슴이 갑갑해졌다. 전세사기를 인지한 첫날에는 법원에서 도착한 서류 탓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우울감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짓눌렀다. 특히 퇴근 후 집에만 오면 이 느낌은 더 심해졌다.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세입자들의 우울감이 온 건물에 휩싸이기라도 한 걸까. 매일매일 전세사기 피해 추후 대응 같은 이야기들을 검색하고 상담받아서일까. 입맛이 없어지고 배도 고프지 않고 잠들기 힘들었다. '내 인생은 언제쯤 제자리로 돌아갈까? 이제 내게 평범한 일상은 오지 않는 걸까' 막연한 우울감이 나를 매일밤 블랙홀로 빠트렸다. 심연에 빠졌으면서도 더 깊은 곳으로 어쩔 수 없이 빨려 들어가야 하는 무섭고 불안정한 밤이었다.
집주인에게 전화가 온 것은 그때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의 전화를 받았다. 첫마디를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최대한 분노를 숨기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물었다. 그는 그가 법무법인을 통해 작성한 파산 신청서대로 답변했다. 마치 그러지 않으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단조롭게. 1. 일자리를 잃어 수익이 없었다. 2. 금리가 높아져 도저히 은행빚을 갚기 힘들었다. 3. 건물을 팔아 보증금을 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4. 결국 파산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고 했는데 이리 돼버렸네요."
나는 다시 심호흡했다. "지금 남일 이야기해요? 그게 무슨 뜻이죠?"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다시 말했다.
"아무튼 지금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나도 머리가 깨질 것 같고 괴로워요. 미안합니다."
전화는 끊겼다. 나는 한참을 그가 한 마지막 말들을 되새겼다. 나는 방금 어떤 전화를 받은 걸까? 사과 전화인가 아니면 내가 더 괴롭다는 어떤 소시오패스의 감정 분출을 들은 걸까? 잠시 후 한 세입자가 "그 새끼(집주인)가 전화와 서는 이런저런 변명만 하다가 우리가 경찰 고소 준비하려는 게 충격이라는 개소리 하더니 끊었어요."라는 카톡을 보냈다.
그는 전세사기 피해자 신청이 통과될 경우 파산 결정이 미뤄질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경찰 조사가 시작되면 그의 계획은 더 틀어질 테지. 그렇다면 여럿의 보증금을 떼먹고도 무리 없이 잘 살 줄 알았던 건가? 그의 사정을 잘 말하면 내가 이해라도 할 줄 알았던 건가? 너무 분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응답만 돌아왔다. 분노의 눈물이 흘렀다.
그날 밤, 세입자들의 카톡방은 분노로 들끓었다. 가해자는 대본을 읊조리듯 똑같이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고, 피해자의 대응에 따라 여러 '명언'을 남겼다. 전세보증금을 어떻게 돌려줄 건지 추후 대책은 마련해야 하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는 "이리 돼버렸네요"라는 답변을.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과 함께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른 피해자의 답변에는 "나도 괴롭다"고 했다고 했다.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았고 조금의 사과조차 전달하려 하지 않았다.
'당장 저 새끼 집에 찾아가서 뭐든 부수자'는 등의 말도 나왔지만, 거주하는 곳을 모르니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또 한 번 무책임하게 피해자들을 짓밟았고, 피해자들은 그저 몸서리치며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처절한 서러움이 다시 나를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