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비를 내지 않으면 생기는 일들

건물 입구를 잠식한 날파리떼

by 윤서A

"에어컨이 고장 났는데 수리비 어떡하죠."

전세사기 당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세입자 단톡방에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초가을이었지만 날은 더웠고, 에어컨이 당장 작동하지 않으면 늦더위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고쳐줄 사람이 없다. 세입자들은 소모품을 제외하고 입주 옵션인 가전제품 등에 문제가 생기면 건물주에게 알리고, 수리비를 청구해 왔다. 그런데 연락도 되지 않는 건물주가 에어컨 수리비를 지급할 리 없었다. 이건 미처 생각지 못한 생활 문제였다. 전세사기를 당했고, 당장 전세보증금을 얼마큼 회수할지 불확실해졌으니 막연하게 이 건물에서 계속 버티며 상황을 지켜보자고 생각했는데, 입주 옵션이었던 가전제품들이 고장 나면 그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곳에서 버티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이미 수천 만원에서 1억 원대 보증금을 저당 잡힌 사람들에게 수리비까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했다.


수리비 문제를 해결하려면 건물주의 파산을 담당한 파산관재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먼저 물어봐야 했다. 세입자들은 파산관재인에게 '또' 전화를 걸기 꺼려하는 눈치였다. 이미 파산 통보문을 받은 직후부터 수차례 여러 명이 전화를 걸었지만, 우리 사건 외에도 맡은 일이 너무 많은 파산관재인은 원론적인 답변 외에는 뚜렷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질문에는 대체로 화나고 억울한 감정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되려 차분한 답변이 돌아오는 것이 이해도 됐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사람이라면 이런 말 저런 말 하나에 상처받기 마련이라. 대표성을 갖고 문의를 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낀 세입자들이 망설이자 결국 내가 손을 들었다.


파산관재인은 우선 자비로 처리하고 영수증을 받아두면, 추후 건물이 경매에 낙찰될 때 보증금에서 상계처리를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결국 건물주에게 돈 나올 곳이 없으니, 자비 부담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건물에서 계속 머무르려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관리비를 계속 내지 않으면 당장 분리수거도 어려워지거든요."

파산관재인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세입자들 대다수가 관리비를 내지 않아 지금 공용 전기세와 수도세 그리고 분리수거 위탁 업체 이용료를 내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건물주의 파산 소식이 알려진 이후부터 세입자들은 파산관재인의 계좌로 매월 관리비를 내기로 돼 있었다. 비록 건물주가 내팽개친 건물이어도, 세입자로서 관리비는 내야 했다. 관리비를 미룬 적 없는 나로서는 뜻밖의 소식이었다.


"저는 내고 있는데요. 다른 사람들 안 내나요?"

파산관재인은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몇 집 빼곤 안 내고 있어요. 관리비를 내지 않으면 저희 쪽에서 내용증명을 보낼 거고, 계속 안 내면 저희도 공과금이나 분리수거 이용료 못 낼 수 있습니다. 그럼 세입자 분들이 알아서 하셔야 해요."


또 다른 문제가 덮쳤다. 도대체 전세사기 피해자에게는 왜 이렇게 다양한 문제들이 연달아 온단 말인가. 세입자들은 전기세와 도시가스 이용요금은 개별 납부하고, 그 외 건물에 필요한 비용은 관리비에서 충당해 왔다. 수도요금, 엘리베이터 전기세, 분리수거비. 파산관재인은 이들 비용이 매달 수십만 원이라고 알려줬다. 세입자 단톡방에 들은 내용을 전달했다. 두세 명이 "저는 내고 있는데요?"라고 답변했고, 나머지는 침묵했다. 침묵은 내지 않았다는 걸 뜻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 확실한 답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관리비를 내라고 강요할 순 없는 일이었다. 당장 전세금마저 떼일 위기인데, 매월 관리비를 내라고요? 내가 왜요?라고 되물으면 나도 뭐라 답할 수 없었다. 전세사기 당한 건물의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분리수거장 관리가 안돼 쓰레기가 나뒹굴어 이중고를 겪는다는 뉴스가 생각났다. '아, 이게 그 수순이구나.'


'관리비를 다 내지 말고, 필요한 만큼만 매월 거둬서 내면 어떨까요?'

침묵하던 한 세입자가 의견을 꺼냈을 때도 대부분 침묵했다. 말을 꺼낸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임을 알았지만, 그러려면 누군가 나서서 매월 총관리비를 계산하고, 세입자에게 알리고, 세입자들에게 관리비를 나눠 받고, 또 납부까지 도맡아야 했다. 약간의 수고비가 책정된다 하더라도 그건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일이었고, 게다가 전세사기 피해로 마음의 여유가 쪼그라든 사람 중 선뜻 도맡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현 상황 유지밖엔 답이 없는 셈. 사람들은 다시 침묵했다.


생각지 못한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관리비를 매월 낸다고 해도 건물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 매월 필요한 금액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 나도 다음 달 관리비를 내야 하나? 내가 내든 안 내든 결국 건물 관리비는 부족해질텐데, 몇 집의 납부로 전체의 공동 관리비 일부를 충당하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겹겹이 쌓였다. 인터넷 등에 검색해 봐도 관리비 납부는 의무였다. 자칫 경매 낙찰 이후 배당금에서 자신이 내지 않은 관리비만큼 그 비용을 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꾸준히 납부한다고 해도, 결국 건물 엘리베이터는 멈추고 분리수거장은 엉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세입자에게 관리비를 내라고 할 순 없다. 내가 앞장서서 건물 관리비를 '관리'하기도 힘들었다.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다음 날 기다렸다는 듯이 분리수거장부터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위탁업체에 월 이용료를 내지 않으니 철수해 버린 것이다. 이제부터는 쓰레기 배출 요일에 맞춰 알아서 세입자 각자가 알아서 생활쓰레기나 재활용 쓰레기를 배출해야 했다. 계단이나 건물 외관 청소를 함께 맡아주던 위탁업체가 오지 않자, 건물도 조금씩 지저분해지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공동 현관문에 가까이 다가가면 전에는 없던 무수한 날파리떼가 스산하게 날아다녔다. 그 날파리떼를 피해 현관문에 들어가면, 거대한 우울이 어깨에 붙어 집까지 따라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분리수거 원칙을 지키지 않은 쓰레기봉투가 나뒹굴었고, 라벨이 제거되지 않은 페트병과 과자 비닐, 매트리스 같은 대형 폐기물도 건물 밖에 무자비로 방치됐다. 몇몇이 쓰레기 배출 때 주의해 달라고 단톡방에 호소했지만, 누가 언제 어떻게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리베이터는 멈췄다가 작동하기를 반복하는 일이 잦아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함께 건물 청소라도 하자며 나서는 사람도 없었고, 나도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며칠 뒤 한 차례 폭우가 내렸다. 방치된 쓰레기와 빗물이 엉켜 수로가 막혔다는 이야기가 단톡방에 올라왔다. 그날은 예정된 관리비 납부일이었고, 나는 관리비를 납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동산 중개소를 찾아갔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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