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없다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건 아냐.”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처럼 홀로 있는 사무실을 떠돌아 다니며 변 회장 아니, 이 회사에 대한 애정이 무럭무럭 자라나던 신입시절이었지만, 가끔은 회장의 막무가내 관심이 무척 부담스러웠을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렇게 애정 어린 손길로 회장실 방을 하나하나 정리하곤, 내 자리에 앉아 9시 땡! 이제 업무 좀 시작해볼까 호기롭게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저 멀리 회장이 출근하면서 한소리를 한다.
그것도 날 콕 집어서.
"자네는 왜 그렇게 항상 기운이 없나?"
신입사원은 항상 에너지가 넘쳐야 하고, 항상 웃음 짓고 있어야한다는 저 꼰대 같은 생각.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뭐가 저렇게 맘에 안 드는 걸까 하는 원망으로 가득찼다.
신입사원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아도,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로 항상 바쁘다. 회사 업무를 따라가기 위해서든,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서든.
아! 요즘 소울리스좌가 유행이던데. 아무 영혼 없는 말투와 표정과 목소리로, 본인의 일을 착착착 잘만 해내는 사람. 그들을 소울리스좌라고 부른다고.
그리고 그분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영혼이 없다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응. 이건 너무나 명언이라 큰 따옴표로 소리쳐줄 필요가 있다. 너무 공감했다.
영혼이 없고, 기운이 없어 보여도,
나는 업무를 좋아했고, 이 회사를 애정 했다.
도대체 그들은 월 백 이백 삼백 주면서
어떻게 영혼까지 갈아 넣길 기대하는걸까?
또 한 번은 그런 적도 있다.
지금은 전염병 때문에 거의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연중행사로 해외지점의 총괄 매니저들이 큰 사업을 따내면 특급호텔에서 기념 만찬식을 나름 성대하게 열었다. 흔치 않은 호텔 디너를 맛볼 수 있는 행복한 생각에 만찬장을 떠다니던 내게 회장은 늘 말했다.
"이런 기회에 해외 매니저들이랑 대화도 좀 하고 그래야 경험이 쌓이지. 자네 영어 좀 하잖아."
만찬장+외국인+술+회장+나.
이 공식의 조합이 완성되기 무섭게 회장은 내게 저 말을 던졌다. 민망할 정도로 자주.
유학생활을 한 내가 영어 대화에 겁이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신입시절 서 부장님이었나 오 차장님이었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두 꼰대 중 하나였을 거다.
누군가가 신입시절 열심히 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날 아껴주셔서 그런 말을 슬쩍해주신 것 같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신입사원이 지 능력 믿고 너무 나대면 안 된다는 말로 이해했고, 그래서 매사 조심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회장의 그 말 앞에 침묵했다.
뭐. 회장은 그런 내가 맘에 안 들었는지 술을 줄창 먹였지만.
왜 그들은 그럴 때마다 한 마디씩 덧붙일까.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 줄 알지? 아끼니까 한잔 주는 거야."
이런 거지 같은 말이 꼭 따라온다.
아무튼 나는 회장의 저런 권유에 그저 '언젠가 내 능력을 보여줄 자리가, 그 기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망설이지 않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거의 독립투사급 마음가짐 아닌가? 후후) 온 세상 방방곡곡에 내 능력을 널리 이뤄 펼치리라!!'
그래. 그런 조금은 오만한 생각만 품고 침묵하기 위해 술을 들이켰던 것 같다.
'쯧.. 그럴 때도 있었지..
나한테만 유독 그런 거 보면 회장님도 날 많이 아꼈다고 생각했는데..
설 팀장 저러고 나온 거 보면 뭐가 잘 안 된 건가?
임원진끼리만 CEO 자리 논하고 회장은 몰랐던 건가?'
회장실에서 거의 튕겨져 나오다시피 나온 설 팀장을 본 이후로, 아인의 머릿속은 신입시절 때의 모습, 변 회장과의 직장생활관계 그리고 최근 CEO가 되는 건가 날아간 건가 하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복잡한 머릿속을 숨기려 애써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보는 척 멍하니 앉아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서 부장의 부들부들 떠는 목소리가 아인을 가리킨다.
"주 과장, 잠깐 나 좀 보자."
그리고 직감적으로 아인의 뇌리에 박히는 한 가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