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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륫힌료르 Nov 30. 2019

나는 한때 '기레기'였다 (1)

'인턴기자'라 쓰고 '기레기'라 읽는다


내가 22살 때, 그러니까 벌써 5년도 더 된 일이다. 중학교 때부터 가슴에 언론인이라는 꿈을 품었던 나는 국내 굴지의 언론사에서 인턴기자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맙소사! 내 기사에 '기레기(쓰레기 같은 기사를 양산하는 기자)'라는 악플이 달렸다.


그래, 나는 한때 '기레기'였다.





[그렇게 '기레기'가 되었다]


아, 이 얼마나 꿈꿔오던 순간인가? 광화문은 정말이지 설렘 그 자체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스카이라인, 서류가방을 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10여 년을 상상만 해오던 바로 그 풍경 속에 내가 실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꿈이 밥 먹여주던, 피 끓는 스물두 살에.




입사 첫날 나는 온라인 이슈팀(가칭)으로 발령 받았다. 내가 맡은 일은 패션/뷰티 기사, 그리고 연예기사를 매일 쓰는 것.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고 있는 내 앞에 금새 시커먼 노트북 한 대가 놓였다.

'뭐지? 나 패션 뷰티 1도 모르는데. 연예인은 더더욱 관심 없는데. 이거 좀 쓰다가 취재하러 나가려나?'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날 이후 나는 6개월 간의 인턴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취재를 나가지 못했다. 하다못해 드라마 제작발표회라도 갈 수 있겠지 기대했지만 시원하게 김칫국을 들이킨 것에 불과했다.


"다른 언론사 기사 보고 '우라까이' 하면 돼."
입사 첫날, 직속선배가 이것저것 알려주며 말했다.

'우라까이'가 뭐지? 나만 못 알아들었나 싶어 몰래 인터넷으로 그 뜻을 검색해봤다. 그런데 웬걸. '다른 신문사의 기사 일부를 대충 바꾸거나 조합해 새로운 자기 기사처럼 내는 행위'란다. 기자 세계에선 거친 은어를 많이 쓴다더니. 내가 처음으로 접한 그 세계의 단어는 그런 뜻이었다.

정신이 어질했다. 아무리 인턴기자라지만 나름 작문시험도 쳤고, 수많은 언론고시생들을 뚫고 면접까지 통과해서 입사한 회사다. 그런데 '우라까이'라니? 내가 인턴 나부랭이여서, 풋내기여서 그런 거겠지? 그래. 이건 연습이고 몇 달 지나면 "자, 이제 너의 기사를 써 봐" 하고 말씀해주시겠지?





['꼬마 기레기'의 번뇌]


야심차게 휴학계를 내고 인턴기자 생활을 시작한지 두어 달쯤, 나는 여전히 남의 기사를 '우라까이' 하고 있었다. 첫 한 달은 난생 처음 해보는 사회생활ㅡ이를테면 전화 받기라던가 선배들에게 깍듯이 인사하기 등ㅡ을 하느라 정신없이 지나갔다. 두 달째에는 그런 잡스러운 일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나 여전히 남의 기사를 베끼는 일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연예인들이 자신의 SNS에 올린 사진들, 다른 언론사가 쓴 글들을 문장만 바꾸어 기계적으로 퍼다 나를 뿐이었다. 하루에 무려 20-30개씩. 발로 뛰며 취재했다면 제대로 된 기사 하나 쓰기도 모자란 시간에 말이다. 그야말로 '기레기'가 된 거다.




하루종일 초점 없는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도 문득 화가 났다. 나는 발로 뛰며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기자가 되길 원했는데. 그런 내가 왜, 내가 쓴 글에 바이라인(이름)이 달리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왜 내 이름 석 자에 떳떳할 수 없는가 말이다. 어쩌다 포털사이트 메인에 내가 쓴 기사가 걸리는 날이면 무지 신기하다가도 이내 고개가 숙여지곤 했다.

'이 짓을 6개월씩이나 해야 하나' 하는 고민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내가 앉은 자리는 다른 언시생들이 간절하게 바랐던 자리일 것이다. 첫 사회생활을 이렇게 허무하게 때려칠 순 없었다. 그러나 순간 순간 고개를 쳐드는 회의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어느 날부턴가 소화가 안 되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듣는 과민성대장증후군이라는 것에 걸렸고, 그때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극심한 생리통에 시달렸으며, 나중에는 음식을 보면 속이 메스꺼운 지경에 이르러 몸무게가 5kg 가까이 줄었다. 그 해 9월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아니라 '버텨내는' 수준으로 꾸역꾸역 살아냈다.

분명 일은 편한데. 앉아서 남의 글만 베껴 쓰니 얼마나 편한가?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망가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추석연휴에 본가에 내려간 나는 결국 연휴 막바지에 "서울 가기 싫다"며 부모님 앞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내 로망이던 광화문이, 언론사가 어쩌다 이토록 끔찍한 곳이 됐을까. 왜 내가 '기레기'여야 하지?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내가 너무 나약한 탓일까? 점점 물음표만 많아져갔다.




ㅡ(2)편에 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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