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 않은 공동체에서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어릴 때 엄마와 같이 있다 보면 사람들이 엄마를
"규원이 엄마” 라고 부르는 걸 자주 듣곤 했습니다.
아이를 낳고부터는 자신의 이름으로 조차 불리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에 어렸을 때의 저는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게 싫었습니다. 훗날 나한테서 태어날 아이가 나에게서 내 이름을 뺏어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저와는 달리
남편이 곁에 없어 절망에 빠져있어도 내 아이를 위해 끈질기게 살아내고, 독립운동엔 추호도 관심이 없었지만 내 아이에게 독립된 나라를 선물해주고 싶기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기 위해 조국을 지키러 나서는,
나의 모든 삶의 목표가 되고 원동력이 되는 자식의 신비함을 일깨워준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으며 느낀 것들을 여과 없이 써내려 합니다.
(물론 제가 주목한 건 자식의 존재보단 “연대”입니다)
*스포일러에 유의해주세요*
먼저 간략하게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일제강점기에 버들, 홍주, 송화 셋이서 사진신부가 되어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 당시시대가 요구하는 여자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 부푼 꿈을 안고 하와이에 갔다가, 현실과 함께 깨진 꿈으로 인한 절망 속에서도 꿋꿋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내는 모습을 담고 있는 감동적인 소설입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는 꾸준히도 공동체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인 버들과 홍주 송화 셋이서 같이 하와이에 건너가고, 하와이에서의 첫 날밤 사진과 너무나도 다른 신랑들의 모습에 절망한 신부들이 버들의 방에서 다 같이 모여자고, 결혼식도 다 같이, 한인들끼리 사는 캠프도 단체생활인 것을 보면요.
이런 겉으로 보이는 공동체적 생활상 말고도,
공동체의 허점 또한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승만파와 박용만파 두 집단으로 갈려 같은 동포끼리조차 다른 파끼리 친하게 지내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괴상한 규칙을 제정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이런 분위기로 인해 버들은 절친인 홍주나 캠프에서 정을 쌓은 줄리엄마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어 혼자가 되어버리기도 하는 어그러진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들은 지독히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공동체로 되돌아가더군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을지라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공동체를 갈망하고, 사랑으로 이겨내 살아가더군요.
(사랑으로 산 버들의 삶은 훗날 버들이 가꾸게 되는 커다란 카네이션 꽃밭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카네이션의 꽃말은 사랑이죠.)
결국 그녀들은 나 하나 잘살면 그만이라는 "개인”이 아닌 서로 간의 사랑인 "연대"로 억척같이 살아냅니다.
저는 이 작품이 아름다운 여성공동체를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녀들은 완벽히 아름답지만은 않은 공동체였기에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고,
완벽히 아름답지 않았기에 그 공동체의 부족한 연대가 강인한 연대로 되기까지의 과정이 빛날 수 있었으니까요.
한편으론, 사랑으로 이겨내고 사랑으로 묶이는 그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와이로 간 것은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고, 돈을 쓰레받기로 담는 지주인 남자와 결혼해 생활고를 벗어나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식민지배 아래 놓인 조선을 떠나 왜놈들에게 핍박받지 않는 지상낙원에 가고 싶다는 개인의 욕망이 바탕이 된 도피라고 생각했습니다.(도피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건 아니잖아요? 그런 뉘앙스를 살짝 풍길 뿐..)
그러나 하와이에서 나 하나 살기 힘들고 우리 가족 살기 힘든 궁핍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독립운동성금을 모금하는 버들을 포함한 한인들과, 작품 내에선 버들의 남편인 태완으로 대표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전선에서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이전에 가정을 지키기 누구보다 바랬을 테지만 이 마음 접고 독립운동을 위해 남편을 보내준 버들처럼 희생하려는 자신의 가족을 기꺼이 조국에 내줄 수 있었던 그들의 가족의 용기 또한 위대한 독립운동임을 느끼며
이제는 하와이로의 “도피”가 아닌 하와이로의 “개척” 임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여담이지만 여기까지는 책을 읽다 중간에 쓴 글이어서 방금 막 책을 다 읽었는데,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도 그녀들을 선구자이며 개척자라고 표현을 하셨더군요.)
“젊은이들 뒤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파도를 즐길 준비가 돼 있었다. 바다가 있는 한 없어지지 않을 파도처럼, 살아 있는 한 인생의 파도 역시 끊임없이 밀어닥칠 것이다.”
“함께 조선을 떠나온 자신들은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파도를 넘어서며 살아갈 것이다.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마다 무지개가 섰다.”
책의 300페이지가량 버들이 주인공이다가 남은 60페이지는 버들의 자식인 진주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것이 엄마의 인생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버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제한적 전지적 작가시점 이어서 자연스레 버들과 내가 한 사람이 된 것 마냥 버들의 삶을 같이 살아갔는데, 막바지에 접어들며 버들이 (가슴으로) 낳은 딸인 진주의 1인칭 시점으로 바뀌더군요. 진주는 딱 버들이 하와이에 왔던 그 나이 또래였고요.
화자가 바뀜으로 인해 책의 주인공 마저 버들의 딸인 진주에게 빼앗긴 것 같았습니다.
이 시점부터 버들이라는 이름 대신 소설에선 정호어매, 엄마 등등으로 대신하여 불렸습니다.
처음에 말했다시피 저는 자식이 모든 것의 목적이 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고, 누구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거 또한 싫습니다. 그래서 싫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제가 읽으며 눈물을 흘린 부분은 모두 버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전개가 된 부분이 아닌, 버들은 엄마로서 뒤에서 받쳐주고 진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부분이었어요.
내가 진짜 진주의 엄마라도 된 것처럼 진주의 행동, 생각 하나하나 귀엽게 느껴지고 흐뭇했습니다.
내 또래인 버들이 아닌 엄마가 된 버들에 더 깊게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엄마가 겹쳐 느껴졌기 때문일지, 뭔지도 잘 모르겠는 "모성애" 라는 것이 여성의 기제인 것인지, 복잡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