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 침입
지수 : 침입
일요일 오후. 백화점을 나서는 우리 손에는 저마다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초겨울 햇살이 따스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로수의 마지막 잎들이 떨어졌다. 노란색, 갈색, 붉은색. 낙엽이 보도블록 위를 굴러다녔다.
"오늘 수연 씨 완전 예뻐. 아까 화장품 매장에서 직원이 연예인이냐고 물어봤잖아."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수연의 귀가 붉어졌다.
"그건 그냥... 영업 멘트예요."
"아니야. 진심이야."
나도 거들었다. 사실이었다. 연한 베이지색 캐시미어 니트에 플레어 스커트. 반쯤 묶어 올린 머리가 목선을 드러냈다. 언니가 골라준 구두는 굽이 낮아 걷기 편해 보였다.
세 달 전만 해도 거울조차 보지 않던 사람이.
수연이 내 눈을 피하며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고,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뉴럴 댐퍼가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일까. 감각 수용체의 민감도가 낮아지면 세상이 덜 압도적으로 느껴질 테니까. 웃을 여유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배고프지 않아? 점심 먹으러 가자."
언니가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오후 2시 반. 아침을 거르고 나온 우리는 다들 허기가 졌다.
***
식당은 백화점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밖으로 가로수가 보였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테이블 위에 따뜻한 직사각형을 그렸다.
"뭐 먹을래?"
메뉴판을 넘기며 물었다. 수연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으로 메뉴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읽고 있었다.
"파스타... 먹어도 돼?"
"당연하지. 오늘 많이 걸었으니까 칼로리 걱정 마."
언니가 웃었다. 수연이 조심스럽게 까르보나라를 가리켰다.
"그럼 이거."
"나도 같은 걸로. 지수는?"
"해산물 리조또요."
주문을 마치고 와인을 시켰다. 낮술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 수연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췄다. 긴 속눈썹 그림자가 볼에 드리워졌다.
"수연아."
내가 불렀다. 수연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기분 어때?"
"좋아."
수연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이상하게... 오늘은 좋아."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수연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렇지? 이렇게 나오니까 기분 전환도 되고."
"응. 지수랑 언니랑 같이 있으니까."
수연이 웃었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볼에 홍조가 번졌다.
와인이 나왔다. 잔을 들었다.
"건배. 뭐라고 할까?"
"음... 우리의 평화?"
언니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평화."
세 개의 잔이 부딪쳤다. 맑은 소리가 울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와인이 루비색으로 빛났다.
***
오후 5시 47분.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트렁크에서 쇼핑백을 꺼내며 웃음소리가 터졌다. 수연이 오늘 산 원피스를 언제 입어볼지 얘기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입어봐. 내가 머리 해줄게."
"진짜요? 언니가?"
수연이 감탄했다. 언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복도를 걸었다. 수연이 쇼핑백을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처음 듣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멈췄다.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어둠이 보였다. 안에서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잠깐."
언니가 팔을 뻗어 우리를 막았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문 잠그고 나갔지?"
"응. 분명히."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오후 1시. 수연이 먼저 나가고, 내가 문을 잠갔다. 디지털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 하는 잠금 확인음까지 들었다. 분명히.
수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녀가 내 팔을 움켜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언니가 천천히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여기서 기다려."
언니가 먼저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그녀의 실루엣이 사라졌다.
10초. 20초.
심장이 귀에서 울렸다. 수연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손도 차가웠다.
"들어와."
언니의 목소리. 평소와 달랐다. 낮고, 단단하고, 분노가 섞여 있었다.
***
거실 불을 켰다.
소파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칼로 난도질한 것처럼. 솜이 터져 나와 눈처럼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쿠션도, 방석도, 등받이도. 하얀 솜뭉치가 거실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발밑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렸다. 내려다보았다. 찢어진 잡지. 구겨진 영수증. 서랍장 안에 있던 것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서재로 향했다.
더 심했다.
책장의 책들이 모두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한 권 한 권 펼쳐진 채로. 아버지의 전공 서적들. 생화학, 분자생물학, 신경과학. 내가 대학 때 쓰던 교재들. 수연이 읽던 소설책들. 누군가 책 속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지, 한 장 한 장 넘겨본 것이다.
컴퓨터 본체의 옆면 커버가 뜯겨 있었다. 나사가 바닥에 굴러다녔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드디스크가 없었다. 빈 슬롯만 덩그러니. USB 포트에 꽂혀 있던 외장하드도 사라졌다.
침실로 갔다.
옷장이 활짝 열려 있었다. 옷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내 옷, 수연의 옷, 뒤섞여서 구분이 안 됐다. 서랍장도 뒤집혀 있었다. 속옷, 양말, 스타킹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화장대 위의 보석함은 그대로였다.
뚜껑을 열어보았다. 금반지. 진주 목걸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브로치. 전부 그대로였다. 손도 대지 않았다.
현금도 마찬가지였다. 서랍장 안에 넣어둔 비상금 봉투. 그대로 있었다.
"이건..."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단순한 도둑이 아니야."
언니가 말했다. 목소리가 차가웠다.
"뭔가를 찾고 있었어. 데이터를."
***
경찰이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복도에서 기다려야 했다. 수연은 내 팔을 꽉 붙잡은 채 떨고 있었다. 유진 언니는 우리를 등 뒤로 감싸듯 서서 엘리베이터 쪽을 경계했다.
30분 후 지구대 경찰관 두 명이 도착했다. 젊은 남자와 중년 여자. 현장을 둘러보더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요즘 이 근방에 이런 사건이 좀 잦아요."
중년 여자 경찰관이 말했다. 귀찮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단순 빈집털이범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문단속 잘 하시고요. 피해 물품 리스트 작성해서 제출해 주시면 수사 진행하겠습니다."
"잠깐요."
내가 끼어들었다.
"현금은 손도 안 댔잖아요. 보석함도 그대로고요. 이게 단순 도둑질이에요?"
"놀라서 도망갔나 보죠."
"CCTV는요? 복도 카메라 확인해 봤어요?"
"아, 그게요."
젊은 경찰관이 머리를 긁적였다.
"CCTV가 먹통이었대요. 복도 카메라, 엘리베이터 카메라, 주차장 카메라 모두 같은 시간대에 신호가 끊겼다가 복구됐대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하세요? 현금은 안 가져가고, CCTV는 정확히 그 시간에만 먹통이고."
"뭐, 장비 오류일 수도 있고요. 요즘 그런 일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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