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 그녀, 내남편(25)

지수 : 전환점

by 빌리박


지수 : 전환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둑해진 뒤였다.


호텔 방의 암막 커튼 틈으로 검푸른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려다가 멈췄다. 어젯밤에 빼놓은 것이 기억났다. 추적당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벗어놓으라는 유진 언니의 지시였다.


"일어나야 해."


유진 언니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 한 마디가 신호탄이 되었다. 우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언제 흘린 식은땀인지 모르겠다.


***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 핸드폰, 신용카드, 심지어 입고 온 옷까지. 위치 추적기가 어디에 숨겨져 있을지 몰라."


유진 언니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증거 인멸' 작업을 시작했다. 핸드폰을 껐다. 유진 언니는 망설임 없이 유심 칩을 빼내 반으로 꺾어버렸다. 작은 금속 조각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기기는 욕조 물속에 던져버렸다. 화면이 한 번 깜빡이더니 꺼졌다.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끈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마이클 강의 명함이 코트 주머니에 있었다. 직통 번호. 버리지 않았다. 유진 언니 모르게 속옷 안쪽에 접어 넣었다.


"비트코인 지갑 번호? 내 머릿속에 있어."


수연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100억. 우리의 유일한 무기이자 생명줄. 그게 진짜 저 안에 들어 있는 걸까.


***


오후 6시 12분. 직원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복도 끝에서 청소 카트를 끌고 오는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등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유진 언니가 태연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지나갔다. 마치 당연히 여기 있어야 할 사람처럼.


"고개 숙여. 자연스럽게."


언니가 속삭였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언니의 뒤를 따랐다. 수연이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내 것인지 수연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식자재 창고를 지났다. 냉동고에서 차갑고 비린 공기가 흘러나왔다. 쓰레기 처리장을 가로질렀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상구를 밀어 여는 순간, 찬 바람과 함께 썩은 음식물과 기름때와 담배꽁초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화려한 스위트룸에서 쓰레기장 뒷골목으로. 불과 몇 분 만에 벌어진 추락이었다.


골목은 어두웠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 유진 언니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2분 후에 와."


우리는 벽에 등을 붙이고 기다렸다. 2분이 20분처럼 느껴졌다. 골목 입구로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칠 때마다 숨을 멈췄다.


그때 낡은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예약해 둔 콜택시가 골목 어귀에 멈춰 섰다. 낡은 개인택시, 운전석에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기사. 디지털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가장 안전한 도주 수단이었다.


"송도로 가주세요."


***


택시 안에는 오래된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가죽 시트가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여놓은 것이 보였다. 창밖으로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송도. 유진 언니가 확보한 연구실. 언니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거다. 어젯밤에 생각한 세 번째 선택지는 — 아직 없다.


거대한 오피스 타워 앞에서 택시가 멈췄다.


"여기야. 내 예전 동료가 차렸던 바이오 벤처 회사야. 시리즈 B 투자에 실패해서 문 닫은 지 좀 됐어. 경매로 넘어가기 직전이라 비어 있거든."


화물용 승강기가 삐걱거리며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인을 잃은 책상들과 먼지 쌓인 실험 기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설비는 갖춰져 있었다. 현미경, 배양기, 각종 실험도구, 그리고 데이터 서버실까지.


"일단 여기라면 당분간은 안전할 거야."


잠자리는 직원 휴게실 겸 당직실이었다. 2층 침대 두 개와 소파 하나. 침대에 앉자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이불에서 습기 찬 냄새가 났다. 오래 방치된 냄새.


"아니, 내 머릿속에 100억이 있는데... 이게 뭐야."


수연이 투덜거렸다.


유진 언니가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려왔다. 인스턴트였지만 따뜻했다. 우리는 낡은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스프링이 꺼져서 엉덩이가 바닥에 닿을 것 같았다.


창가에 서 있던 유진 언니가 말했다.


"보인다."


우리는 통유리 창가로 다가갔다. 저 멀리 호수공원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송도의 마천루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불안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


송도에서의 생활은 기묘한 평화와 살얼음판 같은 긴장이 공존했다.


유진 언니는 도착하자마자 다시 하얀 가운을 입었다. 낡은 벤처 사무실의 먼지를 털어내고, 방치된 실험 기구들을 닦아내는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도망자의 것이 아니었다.


"수연아, 이리 와 봐. 샘플 좀 채취하자."


시작은 가벼웠다. 구강 상피 세포. 면봉으로 입 안쪽을 긁어내는 정도.


하지만 유진 언니의 요구는 날이 갈수록 대범해졌다.


"팔 걷어. 혈액 50cc만 뽑을게."


"언니, 어제도 뽑았잖아. 나 빈혈 걸리겠어."


"엄살 피우지 마. 텔로미어 수치 변화 확인해야 돼."


"지수 네 샘플도 필요해."


"나는 왜?"


"대조군."


바늘이 팔에 들어갔다. 따끔한 느낌. 피가 튜브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검붉은 색.


구강 세포에서 혈액으로. 뇌파 측정도 시작됐다. 혜인의 감각 데이터를 기록했고, 수연의 감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신했고, 이제 혈액과 뇌파까지. 유진 언니가 수연에 대해 모으고 있는 데이터의 양이 매일 늘어나고 있었다.


수연은 투덜거릴지언정 거부하진 못했다. 자신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게 유진 언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


저녁 무렵, 수연과 나는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붉은 석양이 송도 센트럴파크의 수로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며칠간의 실험과 채취로 수연의 피부는 창백했고, 눈 밑은 퀭했다.


"좋다..."


수연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언니, 뉴질랜드 가봤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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