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 복귀
유진 : 복귀
밤이 깊었다.
실험실에서 키보드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집요한 타건음. 유진 언니는 또 밤을 새울 모양이었다. 저 사람은 언제 자는 걸까.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문 틈으로 송도의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수연의 체온이 옆에서 느껴졌다. 따뜻하고, 고요했다.
"언니."
"응."
"박사님이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오래된 질문이었다.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던.
"어렸을 때는 아빠를 미워했어."
말이 저절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는 이상하게 말이 쉬웠다.
"평일에는 주로 아줌마랑 지냈거든. 아빠는 늘 연구소에 있었어."
기억이 떠올랐다. 텅 빈 집. 저녁 여섯 시의 식탁. 혼자 앉아 밥을 먹던 날들.
"주말에만 아빠를 만났어. 그것도 연구소에서."
"연구소에서?"
"응. 아빠 실험실 구석에 내 자리가 있었어. 작은 책상이랑 의자. 거기서 그림 그리고, 책 읽고. 그게 나한테는 놀이터였어."
약품 냄새가 났던 그 방. 아빠의 흰 가운. 현미경에 눈을 대고 있던 뒷모습.
수연이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부드럽게 깍지를 꼈다.
"가끔 윌리엄 아저씨가 왔어."
"윌리엄이?"
"응. 미국에서 올 때마다 우리 연구소에 들렀거든. 아저씨는 늘 내가 엄마를 닮았다고 했어. 올 때마다 선물을 가져왔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때는 윌리엄 아저씨가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빠는 맨날 현미경만 들여다보고, 아저씨는 나랑 놀아줬으니까."
"그랬어?"
수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철없었지."
***
한참 침묵이 흘렀다.
"박사님은."
수연의 목소리가 낮았다.
"언제나 네 생각뿐이었어. 네가 얼마나 엄마를 닮았는지. 웃는 모습이, 말투가, 고집 부리는 것까지."
수연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눈이 빛났다.
"제발 병이 발병하지 않아야 할 텐데. 늘 그 말씀을 하셨어."
가슴이 조여왔다. 아빠. 그 사람은 평생을 그 걱정만 하며 살았던 건가.
"박사님은 연구실에서 네 사진을 봤어. 내가 처음 연구소에 갔을 때, 박사님 책상에 네 사진이 있었어. 고등학교 졸업 사진. 액자가 닳아 있었어. 매일 만졌나 봐."
"그 사진..."
기억났다. 졸업식 날 아빠가 찍어준 사진. 어색하게 웃고 있는 열여덟 살의 나.
"박사님이 말씀하셨어. 내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숨이 막혔다. 그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없었다. 아빠는 그런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수연한테 고마웠다. 내가 모르던 아빠의 모습을 들려주니까.
하지만 동시에 아팠다. 딸인 내가 모르는 아빠를, 남편이었던 수연이 알고 있다는 게. 아빠의 마지막 몇 년을 곁에서 본 건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었다.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소리 없이. 베개가 젖어갔다.
수연이 나를 안았다. 품이 따뜻했다. 샴푸 향이 났다.
"내가 있잖아. 내가 널 지켜줄게."
고개를 들었다. 수연의 얼굴이 가까웠다.
입술이 닿았다.
***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커튼 사이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간만에 푹 잔 것 같았다.
수연은 아직 자고 있었다. 내 팔을 베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잠든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실험실 쪽에서 커피 내리는 소리가 났다. 유진 언니가 밤을 꼬박 샜나 보다.
수연이 눈을 떴다. 초점 없는 눈이 천천히 나를 찾았다.
"일어났어?"
"응. 배고파."
"일어나. 뭐 해줄게."
이불을 걷었다. 햇살이 방 안 가득 쏟아졌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날카로운 소리였다. 평화가 깨지는 소리.
***
세 사람이 현관 앞에 모였다.
유진 언니는 밤새 연구했는지 눈 밑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수연은 내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모니터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마이클 강. 지난번 호텔 로비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었다.
"전해드릴 소식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인터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윌리엄 박사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윌리엄이.
죽었다고?
손이 멈췄다. 모니터를 잡으려던 손이.
어젯밤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이 침대에 누워서 윌리엄 아저씨 이야기를 했다. 선물을 가져오던 아저씨. 내가 엄마를 닮았다고 하던 아저씨.
그 사람이 죽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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