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 연구소
지수 : 연구소
송도 연구소 입구.
거대한 은색 건물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유리 외벽에 겨울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바람에 금속 냄새가 실려왔다. 차갑고 비릿했다.
차단기가 올라갔다. 유진 언니의 차가 천천히 들어갔다.
로비 앞에 실루엣이 보였다.
마이클 강.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연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어깨가 굳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어제 우리 집에 왔을 때도 그랬다. 수연은 마이클 강을 처음 보는 게 아닌 것처럼 반응했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던 그 눈빛.
손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닿았다.
무의식이었다.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걱정하는 사람이 이를 악물지는 않는다.
***
안내를 받아 들어간 내부는 차가웠다. 소독약 냄새. 흰색과 은색으로 도배된 공간. 발자국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메아리쳤다. 먼지 하나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무균실.
"이곳이 메인 랩입니다."
마이클 강이 유리문을 열었다. 냉기가 얼굴을 스쳤다.
유진 언니의 눈이 커졌다.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최신 시퀀서, 질량 분석기, 대형 멸균기들이 도열해 있었다. 안쪽에 fMRI, PET 스캐너.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뇌파 분석 장비."
마이클 강이 언니를 바라보았다. 눈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았다. 장비가 아니라 언니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반응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전부 준비해 뒀습니다."
언니는 홀린 듯 장비들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금속 표면 위를 미끄러졌다. 과학자의 본능이 경계심을 잠시 덮은 것 같았다.
"숙소는 이쪽입니다."
연구동과 이어진 별관. 문을 열자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 대리석 바닥. 가죽 소파에서 새 가구 냄새가 났다. 통유리창 너머로 겨울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잿빛 파도.
"세 분이 지내시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이게 다... 우리 집이라고요?"
수연이 입을 벌렸다.
"감옥치고는 꽤 화려하군요."
내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의도한 게 아니었다.
마이클 강이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서 뭔가를 읽으려 했다. 놀람? 불쾌?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어제 우리 집에서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알고 있다던 그 말.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해 주시면 됩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입술의 모양만 바뀌었다.
"물론, 빠르면 더 좋겠죠."
***
그가 돌아서려 할 때, 나는 물었다.
"어제 하신 말."
마이클 강이 멈췄다.
"아버지를 만난 적 있다고 하셨잖아요. 언제요?"
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3초. 묘한 표정이었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마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건가.
"여러 번 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게 무슨 뜻이에요?"
"시간이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적응하시는 게 먼저입니다."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무거운 소리.
오래전부터.
그 말이 목에 걸렸다. 삼켜지지 않았다.
***
짐을 풀었다. 각자 방을 정하고, 옷을 걸고, 세면도구를 놓았다. 옷걸이가 봉에 부딪히는 소리. 지퍼 소리. 일상은 낯선 공간에서도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수연이 말했다. 옷장에 옷을 걸다 말고.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어디?"
"그냥... 좀 둘러보고 올게. 답답해서."
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물을 틈도 없이 수연은 방을 나갔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 잿빛 파도.
따라가야 하나.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다음에 — 따라가서 뭘 하려고?
수연이 어디를 가든 수연의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
두 시간이 넘었다.
수연이 돌아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 핏기가 없었다. 찬바람을 오래 맞은 사람의 얼굴.
"어디 갔다 왔어? 어디 아파?"
"아냐 괜찮아."
수연이 외투를 벗었다. 손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그냥 건물, 바다 구경했어.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봐."
평소와 달랐다. 수연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수연아?"
"응?"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수연이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눈이 따라가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물으면 물을수록 수연은 더 닫힐 것이다. 아는데도 참기가 어려웠다.
***
저녁.
응접실에 모였다. 테이블 위에 배달 음식이 펼쳐져 있었다. 짜장면 냄새.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유진 언니는 이미 태블릿을 끼고 앉아 있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정리해 보자."
언니가 화면을 띄웠다. 복잡한 화학식과 세포 구조도가 허공에 투사됐다. 푸른 빛이 언니의 얼굴을 비췄다.
"이제 장비가 갖춰졌으니까. 이번 주 안에 수연이 뇌 스캔을 할 거야."
"뇌 스캔이요?"
수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손이 무릎 위에서 움켜쥐어졌다.
"며칠 전에 발견한 거 기억하지? 수연이 뇌파랑 T-오가넬 활성화 시점이 일치한다는 거. 그게 뭘 의미하는지 확인해야 해."
언니의 설명은 빨랐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날아다녔다.
"내 가설이 맞다면, 수연이 뇌에 레시피 2.0의 핵심이 각인되어 있는 거야. 확인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
"다음 단계요?"
"지수 치료제. 그게 1차 목표야."
치료제. 그 단어가 가슴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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