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 그녀, 내남편(31)

유진 : 의심

by 빌리박


유진 : 의심


아침 일찍 수연의 손을 잡고 숙소를 나섰다.


지수에게는 검체 채취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냉동고에는 이미 수연의 혈액과 조직 샘플이 수십 개나 쌓여 있었고, 당장 추가 채취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진짜로 원했던 건 수연과 단둘이 이야기할 시간이었다.


연구동으로 향하는 복도는 이른 아침이라 한산했다. 내 뒤를 따라오는 수연의 발소리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옆눈으로 힐끗 살펴보니 역시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창백한 안색, 눈 밑의 짙은 그림자, 그리고 무언가에 짓눌린 듯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처음 송도에 도착했을 때는 단순한 환경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라고 생각했다. F-72의 고감도 신경 시스템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시적인 불안정 상태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수연의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오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연구동 3층의 빈 회의실로 수연을 데리고 들어갔다. 문을 닫자 수연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체 채취... 여기서 하는 거예요?"


"일단 앉아."


내가 맞은편 의자에 먼저 앉자 수연도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회의실 테이블 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수연은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는데,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연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수연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너 요즘 무슨 일 있는 거지?"


"..."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수연은 한동안 테이블만 응시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수연아."


"정말 없어요, 언니.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환경이 바뀌어서..."


수연이 고개를 들고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은 입술에만 머물러 있을 뿐 눈까지 닿지 못했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나는 의도적으로 목소리 톤을 낮추었다.


"너 송도 온 첫날부터 이상했어. 로비에서 마이클 강을 처음 봤을 때 움찔하는 거 내가 봤거든. 그리고 그날 두 시간 동안 어디 갔다 온 거야?"


"그건..."


"건물 구경? 바다 구경? 그렇게 오래?"


수연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돌아왔을 때 네 상태를 내가 봤어. 쇼크 직전이었어, 수연아. 단순히 산책하다 온 사람 컨디션이 아니었다고."


나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 얼굴이 어떤지 알아. 너 지금 그 얼굴이야."


수연의 눈이 흔들렸다. 동공이 확장되는 것이 보였다.


수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양손이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


"말해."


"나한테까지 숨길 거야? 나는 너희 편이야. 지수 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네 편이기도 해."


수연의 눈가에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말하면..."


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하면 언니도 나를 싫어하게 될 거예요."


그 말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대체 이 아이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싫어하게 될 리가 없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수연이 한참 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결국, 수연의 입이 열렸다.


"제주도에서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돌아오기 전날... 뭔가 있었어요."


***


수연의 고백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제주도의 호텔 라운지 바. 낯선 남자의 접근.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일.


듣는 동안 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F-71의 감각 수용체가 한계를 넘었을 때 혜인에게 일어났던 일. 눈이 풀리고, 이성이 꺼지고,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던 그 순간들. 수연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멈출 수가 없었어요."


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머리로는 안 된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계속 외쳤는데... 몸이 말을 안 들었어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혜인이 했던 말과 거의 같았다. 바디 모델은 달라도 구조는 같으니까.


"그래서 공항에서 쓰러진 거구나."


"네. 뉴럴 쇼크... 언니가 설명해줬던 그거요."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수연은 닦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뭐?"


"송도에 와서... 마이클 강이 저를 찾아왔어요."


"첫날 로비에서 저를 보더니 바로 알아봤어요. F-72라는 걸."


수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었어요."


"뭐라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가 어떻게?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 남자... 제주도에서 만난 그 남자가 마이클 강이 보낸 사람인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확실하진 않아요. 근데... 마이클 강이 그 일을 너무 자세히 알고 있었어요. 어떤 호텔이었는지, 몇 시였는지, 심지어 제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까지."


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연히 알게 된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계획된 거였을 거예요."


정황상 수연의 추측이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확증은 없었다. 마이클 강이 직접 함정을 파놓은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정보를 입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상이 있대요. 그날... 그날 밤의 영상이."


수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수 언니한테 보여주겠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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