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 그녀, 내남편(32)

지수 : 의장

by 빌리박


지수 : 의장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서 수연이 자고 있었다. 고른 숨소리.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무릎을 가슴 쪽으로 웅크린 자세. 세상이 무서운 사람의 잠자리.


창밖으로 송도의 야경이 보였다. 불빛들이 먼 바다 위에 흩어져 있었다.


***


그날이 떠올랐다.


사고 당일. 전화를 받았을 때, 병원이라는 단어만 들렸다. 나머지는 다 소음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응급실 복도에 서 있었다.


준우가 죽으면.


그 생각이 스쳤을 때, 슬픔보다 먼저 온 건 공포였다.


나한테 아무도 없다.


엄마도, 아빠도. 준우 말고는 없었다. 이 사람이 죽으면 나는 진짜로 혼자다. 세상에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람이 된다.


의사의 가운을 잡았다. 살려주세요. 뭐든 할게요. 살려만 주세요.


살아만 있으면 됐다. 어떤 모습이든. 내 옆에만 있으면.


수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피부. 긴 속눈썹. 작은 입술.


그때는 안도했다. 살아있으니까.


지금은.


애처로웠다.


김준우. 증권사 차장 후보. 임원 승진이 유력했던 남자. 자신감 넘치고, 목소리 크고, 술자리에서 항상 분위기를 이끌던 사람. 나보다 한 뼘 더 컸고, 어깨가 넓었고, 내가 힘들 때 "내가 다 해줄게"라고 말하던 사람.


나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이 처음 들었다. 아니, 처음은 아닐 거다. 하지만 이렇게 또렷하게 문장으로 떠오른 건 처음이었다.


나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은 증권사 사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낯선 도시의 낯선 침대에서, 밤마다 악몽을 꾸고 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눈이 흔들리고, 밖에 나가면 시선이 무서워 고개를 숙인다.


초라했다.


잔인한 단어인 줄 알면서도,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사람을 동등하게 보지 않게 된 것은.


처음에는 남편이었다. 모습이 바뀌어도 남편. 내 짝. 나와 나란히 서는 사람.


어느 순간부터 수연은 내 옆이 아니라 내 아래에 있었다. 내가 안아주고, 내가 달래주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이끈다. 수연은 따라온다. 고개를 끄덕인다. "언니가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한다.


파트너가 아니었다. 보호 대상이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가슴 한쪽이 싸늘해졌다. 이건 사랑일까. 아직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책임감. 의무감. 연민.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이 사람을 볼 때 설레지 않는다는 것.


그게 가장 잔인한 변화였다.


***


엄마, 아빠, 윌리엄을 생각했다.


세 사람. 내 인생에서 사라진 세 사람. 하지만 사라지기 전에 뭔가를 남긴 사람들.


엄마는 MELAS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연구를 시작했다. 엄마의 병을 고치겠다고. 그리고 내 병도. 아빠는 그 연구를 위해 칼릭스를 세웠다. 윌리엄은 아빠가 죽은 뒤에도 그 연구를 이어갔다.


그 회사가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사회의 의장 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의 병. 아빠의 연구. 윌리엄의 헌신. 모든 것의 끝에 내가 서 있다.


받아들여야 한다. 아빠가 남긴 연구를 끝내는 건 나여야 한다.


그리고 이건 수연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MELAS 치료제가 완성되면 나는 안전해진다. 내가 안전해지면 수연을 더 오래 지킬 수 있다.


정말?


정말 수연을 위한 걸까. 이 방에 수연을 두고 나서면서?


생각을 멈췄다. 더 파고들면 안 될 것 같았다.


***


새벽빛이 창문 아래쪽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일어났다. 조용히. 수연을 깨우지 않도록.


옷장을 열었다. 마이클 강이 보내준 쇼핑백. 열어보지 않았었다. 오늘 열었다.


네이비색 재킷. 하얀 블라우스. 잘 재단된 슬랙스. 검은 펌프스.


손끝으로 원단을 만졌다. 울 혼방. 부드럽고 단단한. 비싼 옷이었다. 이 옷을 받아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스쳤다. 스치고 지나갔다.


화장대 앞에 앉았다. 오랜만이었다. 서랍에서 파우치를 꺼냈다. 먼지가 쌓여 있었다. 넉 달간 열어보지 않은 파우치.


베이스를 깔았다.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눈썹을 그렸다. 아이라인을 넣었다. 립스틱. 빨간색과 코랄 사이에서. 빨간색을 골랐다.


거울을 보았다.


2년 전의 나였다. 회사에 다니던 나. 은지수라는 이름표를 단 사람.


재킷을 입었다. 어깨에 딱 맞았다. 펌프스를 신었다. 키가 5센티미터 올라갔다.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어울렸다.


거울 속의 내가 오랜만에 살아있는 것 같았다.


뒤에서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수연이 반쯤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언니...?"


잠에 젖은 목소리.


"어디 가?"


"일하러."


짧게 대답했다. 미소를 지었다.


수연이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덜 깬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조심해, 언니."


그 말을 등 뒤로 듣고,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섰다. 문이 닫혔다.


몸이 가벼워졌다.


복도의 찬 공기가 폐를 채웠다. 어깨가 펴졌다. 시야가 넓어졌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수연 옆에 있을 때는 한 번도. 수연을 씻기고, 달래고, 재우고, 일어나고. 그 반복 속에서 줄곧 조여왔던 것이 — 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풀렸다.


미안해.


미안한데, 발이 멈추지 않았다.


그 사실이 죄책감이 되었다. 이 가벼움 자체가 배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


차가 연구단지 정문을 통과했다.


마이클 강이 운전석에서 백미러로 나를 힐끗 보았다.


"긴장되세요?"


"아니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늘 이사진은 여섯 분이 참석합니다. 모두 사전에 동의하셨습니다.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형식적. 이 사람이 준비한 것이니까. 이사들을 설득하고, 서류를 정리하고, 반대표를 제거하고 — 그런 일들을 이미 끝낸 사람이 형식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능했다. 그게 무서운 거고, 그게 안심이 되는 거였다.


"당신이 앉아야 할 자리에, 당신이 앉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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