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 그녀, 내남편(1)

[지수] 사고

by 빌리박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 아침 기온 영하 8도. 도로 위에 얼어붙은 눈이 검게 변해 있었다.


오전 7시 40분. 현관문이 닫혔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남편의 마지막 소리였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였던 남편은 늘 바빴다. 현관에 벗어놓은 운동화 한 짝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식탁 위에는 반쯤 마시다 남긴 커피잔이 있었다. 컵 테두리에 묻은 희미한 입술 자국. 아직 온기가 남은 검은 액체.


조용한 집이었다. 늘 조용했다. 아이가 없으니, 남편이 나가면 이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아침의 잔해들을 치우며 저녁에는 김치찌개를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전 9시 12분.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남편'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여기 성모병원 응급센터입니다. 김준우님 보호자 분 되시죠?"


입이 열리지 않았다. 성대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사무적인 톤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사거리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남편의 승용차를 반대편에서 과속으로 직진하던 자율주행 화물차가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자율주행 화물차. 레벨 5. 중앙선 침범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차량이다. 삼중 안전장치가 있고, 센서가 있고, AI가 있다. 그런 차가 왜.


그 의문은 나중에야 떠올랐다. 그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파쇄(破碎)'.


의사는 남편의 상태를 그렇게 표현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계속해서 그 단어를 곱씹었다. 종이나 유리를 부술 때나 쓰는 단어.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회색 하늘. 검게 얼어붙은 눈. 사람들은 코트 깃을 세우고 걷고 있었다.


병원 복도에는 소독약 냄새가 흘렀다. 중환자실 앞 대기 공간. 울지 못하는 사람들. 나는 수술실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출근길 정체에 대해 불평하는 메시지를 보냈었다.


[오늘따라 차가 안 움직이네. 저녁에 봐.]


자동문이 열리고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나왔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이 지독하게 피로해 보였다. 그는 내게 다가와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인체 모형도가 띄워져 있었다. 온통 붉은색 경고등이 점멸하고 있었다.


"보호자분,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들으십시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사고 당시 트럭에 적재되어 있던 산업용 화학 물질이 유출되었습니다. 그게 차량 내부로 스며들면서 남편분의 하반신과 주요 장기에 심각한 화학적 화상을 입혔습니다. 물리적 충격보다 그게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현재 전신 다발성 장기부전 상태이며, 생물학적 육체는 이미 '기능 정지'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그럼... 죽는 건가요?"


의사는 태블릿을 조작해 뇌 스캔 영상을 띄웠다.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점멸하는 3D 모델.


"보시다시피 현재 남편분의 뇌와 중추신경계는 아직 활성 상태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입니다."


그가 화면을 확대했다. 뇌에서 시작해 척수로 이어지는 신경계 네트워크가 보였다.


"뇌세포는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 4분 만에 비가역적 손상이 시작됩니다. 척수 신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남편분의 심장은 기계적 보조 장치로 겨우 뛰고 있지만, 손상된 폐와 간이 혈액을 제대로 정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소 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어요."


의사가 그래프를 가리켰다. 가파르게 하강하는 곡선.


"현재 뇌로 공급되는 산소량은 정상의 40% 수준입니다. 이 상태가 30분 이상 지속되면 대뇌피질부터 괴사가 시작됩니다. 기억, 인격, 감정을 담당하는 영역이 먼저 죽어갑니다."


숨이 막혔다. 의사는 계속했다.


"더 심각한 건 화학물질 오염입니다. 사고 당시 유출된 산업용 용제가 혈류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염된 혈액이 혈액-뇌 장벽을 뚫고 뇌조직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척수액도 오염되고 있고요."


화면에 시뮬레이션 영상이 떠올랐다. 검붉은 입자들이 뇌 표면에 달라붙어 퍼져나가고, 척수를 따라 내려가는 모습.


"이 독성 물질이 신경세포막을 파괴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산소를 공급해도 소용없습니다. 세포 자체가 녹아내리니까요. 저희가 '골든 타임'이라고 부르는 시간이 있습니다. 뇌-척수 이식 수술의 경우, 오염 물질이 신경계 심부까지 도달하기 전에 적출해서 세척해야 합니다."


의사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편분의 골든 타임은 1시간입니다. 그 안에 뇌와 척수를 적출하고, 뉴럴 워싱으로 오염 물질을 제거한 뒤, 새로운 신체에 이식해야 합니다. 1시간이 지나면... 살려낼 중추신경계 자체가 없어집니다."


의사는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복잡한 그래프와 수치들.


"지금 당장 결단하셔야 합니다. 뇌와 척수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적출 직후 '뉴럴 워싱'으로 오염 물질만 걸러낸다면, 신경계 기능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식하지 않으면, 남편분은 영영 가망이 없습니다."


뇌-척수 이식. 뉴스에서나 보던 그 기술. 떨리는 손으로 의사의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살려주세요. 무슨 짓을 해서든... 보험이 있어요. 남편이 최고 등급의 생명 보험을 들어뒀다고 했어요."


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트를 다시 확인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데 그게 문제입니다."


"문제라니요?"


"현재 수도권 내 바이오 배양 공장의 파업과 원자재 수급 문제로 인해 '표준 남성형 바디'의 재고가 전무합니다. 지금 주문을 넣어도 배양 탱크에서 성인 남성의 신체를 출력해 수령하기까지 최소 일주일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일주일... 일주일만 버티면 되는 거잖아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남편분은 1시간을 버티지 못합니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부품이 없어서 죽어야 한다니.


"그럼... 방법이 없다는 건가요?"


의사는 잠시 주저하더니, 태블릿 화면을 다시 조작해 새로운 창을 띄웠다. 화면 한가운데에 20대 여성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지금 당장 병원에 가용한 재고는 딱 하나뿐입니다."


의사가 잠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믿기 어렵다는 듯이.


"사실 이것도 기적에 가깝습니다. F-72는 수십억 원짜리 프리미엄 모델인데, 왜 응급 재고로 이 병원에 배치되어 있는지... 본사에서도 기록을 확인 중이라고 합니다."


"여성형 모델, 'F-72'입니다."


"여... 자요?"


"네. 주로... 상류층 여성들이 노화를 피하기 위해 거액을 들여 육체를 교체하는, 일종의 '전신 성형' 용도로 납품되는 모델입니다만, 생체 호환성은 최상급입니다. 신경 반응 속도가 매우 빠르고 면역 거부 반응이 적어서, 지금 같은 응급 이식 수술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무미건조하게 스펙을 읊어댔다. 골격은 티타늄 합금 기반, 피부는 최고급 실리콘과 배양 상피 세포의 하이브리드, 인공 장기는 반영구적 수명... 하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화면 속의 F-72.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 잡티 하나 없는 피부.


내 남편. 180cm의 키에 80kg의 체구. 주말이면 소파에 누워 코를 골고, 땀 냄새가 섞인 셔츠를 아무 데나 벗어놓던 사내. 저 가냘픈 몸 속에 갇힌다.


"다른 건... 정말 없나요?"


"없습니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부인. 남편분을 이대로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형태가 바뀌더라도 살리시겠습니까?"


의사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병원 측에서도 권장하지 않는 옵션입니다. 본인의 동의 없이 성별이 다른 육체로 이식하는 것은 추후 심각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나 '인격권 유린' 문제로 소송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깨어난 환자가 자신의 신체를 거부하며 자해하거나, 보호자를 고소하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


모니터 속의 바이탈 사인이 점점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가 없는 세상. 그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는 것. 그마저 사라지면 내겐 이제 아무도 없다.


"진행해... 주세요."


"나중에 남편분이 원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책임은 보호자분이 지셔야 합니다."


"상관없어요... 제발."


내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혀끝에서 쓴맛이 났다.


"그를 살려만 주세요."


동의서에는 '수술 이후 발생하는 환자의 정신적 외상 및 정체성 혼란에 대해 병원은 책임지지 않음'이라는 문구가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펜을 쥔 손이 멈췄다.


깨어나면 그가 나를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서명했다.


"보호자 참관을 원하시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간호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떼면 그가 사라질 것 같았다.


수술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유리벽 너머 참관실로 안내되었다. 수술실 내부는 차갑고 푸른 조명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


중앙 수술대 위에는 머리와 척추만 남은 채 천으로 덮인 남편이, 그리고 그 옆에는 머리 뚜껑과 척추관이 열린 채 대기 중인 F-72의 하얀 나신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정교한 로봇 팔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이저 메스가 남편의 두개골과 척추를 따라 절개했다. 붉은 피가 튀는 대신, 특수 흡입기가 순식간에 체액을 빨아들였다.


이윽고 로봇 팔이 남편의 뇌와 척수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들어 올렸다.


숨이 멎었다.


뇌간에서 시작해 경추를 거쳐 흉추까지 이어진 긴 신경 다발. 생각보다 길었다.


그의 35년. 증권가에서 날카로운 분석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간들. 그의 모든 기억과 욕망. 나를 향한 사랑의 맹세들. 어제 저녁까지 우리가 나누었던 사소한 농담들. 전부 저 붉고 주름진 덩어리와 그것에서 뻗어나간 하얀 신경 다발 안에 들어 있다. 저것만이 진짜 '그'였다.


남편의 뇌와 척수는 전선 다발이 연결된 긴 투명한 실린더에 담겨 액체 속에 부유했다. 웅웅거리는 낮은 진동음과 함께 실린더 내부에서 미세한 회오리가 일었다. 뉴럴 워싱. 뇌 주름 사이, 척수액 사이에 낀 오염된 혈액을 강제로 씻어내는 과정이었다. 맑은 특수 용액이 중추신경계 전체를 감싸자 검붉은 불순물이 씻겨 나갔다.


세척이 끝나자 수천 개의 미세 전극이 뇌신경과 척수신경 다발에 달라붙어 실시간으로 시냅스 신호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참관실 모니터에 그의 의식이 디지털 파형으로 치솟았다.


삐- 삐- 삐-.


규칙적인 전자음. 그가 아직 살아있었다.


"이식 시퀀스 개시."


집도의의 명령과 함께 로봇 팔이 천천히 움직였다. 붉고 말랑한 뇌와 그것에서 뻗어나온 긴 척수가 차가운 고정액을 지나, F-72의 열려 있는 두개골과 척추관 안으로 조심스럽게 삽입되었다.


모니터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연결 지점: 흉추 4번 / 신경 섬유 매칭 중... 89%... 94%... 99%]


나노봇들이 수백만 개의 신경 섬유를 하나하나 정확히 매칭해서 봉합하기 시작했다. 0.1mm라도 어긋나면 전신마비. 참관실 모니터에 '수술 성공률 68%'라는 수치가 깜박였다.


F-72의 하얀 피부 아래로 붉은 핏줄이 연결되고, 신경망이 접속되는 순간, F-72의 손끝이 떨렸다.


"접속 완료. 동기화율 87%... 92%... 100%."


모니터의 그래프가 안정적인 곡선을 그렸다. 잠들어 있던 F-72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창백했던 볼에 혈색이 오르고,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수술이 끝났다.


의료진이 수술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유리벽에 두 손을 짚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은 낯선 여자였다.


남편의 얼굴이 아니었다. 각진 턱선이 사라졌다. 면도 후에도 거칠던 피부가 사라졌다. 대신 누워 있는 얼굴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가늘고 작은. 내가 아침마다 마주하던 얼굴과 어떤 접점도 없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윤기 나는 흑갈색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올 것 같은 긴 생머리. 수술대 위로 흘러내려 바닥에 닿을 듯했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목선이 가늘고 길었다. 쇄골이 우아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가슴.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다가 멈췄다. 천 위로 드러난 윤곽. 남편에게는 없던 것이었다.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릴 수 없었다. 저것이 남편이라는 사실과, 저것이 남편일 리 없다는 감각이 동시에 눌러왔다.


시선을 더 내렸다.


전부 달랐다. 체구도, 골격도, 비율도. 주말이면 소파 팔걸이 밖으로 삐져나오던 남편의 긴 다리. 러닝을 하고 돌아와 땀에 젖은 넓은 등. 내 손을 완전히 감싸던 크고 투박한 손. 그런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수술대 위의 사람은 나보다 작았다.


이게 내 남편이라고?


180cm의 키에 80kg의 체구. 넓은 어깨. 투박한 손. 면도 후에도 남아 있던 거친 턱선.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대신 누워 있는 것은 완벽한 여성의 신체였다. 키는 165cm 정도로 보였다. 체중은 50kg도 채 안 될 것 같았다. 어깨는 좁고 둥글었다. 수술대 옆으로 늘어진 손은 가늘고 하얗고, 손가락은 길고 섬세했다.


유리 너머로 간호사가 그 손목에 링거를 연결하는 것이 보였다. 손목 안쪽으로 푸른 핏줄이 비쳤다. 살아 있었다.


"준우야..."


내 입에서 남편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이름이 저 얼굴에, 저 몸에 어울리지 않았다.


저 사람은 누구지?


내 남편이 맞아?


저 아름다운 얼굴 뒤에, 저 여성스러운 몸 안에, 정말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들어 있는 걸까?


참관실 모니터에 뇌파가 안정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래프 위에 작은 글씨가 떠 있었다.


[환자명: 김준우 / 이식 바디: F-72 / 척수 연결: 흉추 4번 / 동기화 상태: 정상]


남편은 살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남편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졌다.


나는 유리에 이마를 대고 흐느꼈다. 차가운 유리 너머로, 낯선 여자의 얼굴을 한 남편이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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