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우] 부활
빛이 먼저였다.
희끄무레한 빛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왔다. 형광등. 병원 특유의 차갑고 균일한 빛이었다. 눈을 뜨려고 했다. 안 됐다. 눈꺼풀이 시멘트처럼 무거웠다.
소리가 들렸다. 삐— 삐— 삐—. 심장 박동을 따라가는 기계음. 발소리가 겹쳤다. 고무창이 리놀륨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수치 안정적입니다."
여자 목소리. 간호사인가.
"동기화 모니터링 계속해. 48시간 지나야 확정이야."
남자 목소리. 의사. 클립보드 넘기는 소리가 딸깍거렸다.
병원이군. 그건 알겠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팔뚝 안쪽에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다. 차가운 액체가 혈관으로 흘러들어왔다. 가슴팍에 전극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코에는 산소 호스. 온몸이 기계에 연결되어 있었다.
움직이려 했다. 손가락 하나를 구부리려 했다. 안 됐다.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팔도, 다리도, 고개도. 눈꺼풀조차.
이상하다. 의식은 또렷한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마비인가? 척추를 다친 건가?
기억을 더듬었다. 출근하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커피를 반쯤 마시고 집을 나섰다. 차에 탔다. 도로가 막혀서 짜증이 났다. 지수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차가 안 움직인다고.
그 다음.
사거리. 신호가 바뀌었다. 출발했다.
정면에서 뭔가 달려왔다. 화물차. 중앙선을 넘어서. 거대한 그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브레이크를 밟았나? 핸들을 꺾었나? 기억이 없다. 충돌. 유리가 폭발하고 철이 구겨지는 소리. 그 다음은 — 아무것도.
사고가 났구나. 그래서 병원에 있는 거다. 살아있다. 움직이지 못하지만 살아있다.
지수는 알고 있을까?
"보호자분은 대기실에 계십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의사와의 대화. 하지만 들렸다.
보호자. 지수다. 여기 와 있다. 일단 안심이다.
"이식 후 24시간. 바이탈 안정. 신경 접속 상태 양호."
이식? 무슨 이식? 장기 이식인가? 심장? 간?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졸음이 밀려왔다. 진정제가 의식을 잠식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생각은 —
지수야, 나 여기 있어.
어둠이 다시 밀려왔다.
***
두 번째로 깨어났을 때, 눈이 떠졌다.
흐릿했다. 초점이 안 맞았다. 천장의 형광등이 번져 보였다.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시야가 선명해졌다.
하얀 천장. 하얀 벽. 모니터 화면의 초록빛 파형. 병실이었다.
고개를 돌리려 했다. 안 됐다. 하지만 눈알은 움직였다.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왼쪽으로.
유리벽이 보였다. 그 너머에 사람이 있었다.
지수.
내 아내가 거기 있었다. 유리 너머 대기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깨가 떨렸다. 울고 있었다.
울지 마. 나 괜찮아. 살아있잖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울고 있는 얼굴이 왜 이렇게 예쁘지? 원래도 예뻤지만 — 뭔가 다르다. 큰 눈. 눈물에 젖어 반짝이는 속눈썹. 목선을 따라 흘러내린 머리카락.
잠깐. 내가 지금 뭘 생각하는 거지? 사고 당해서 병원에 누워 있는데?
약 때문이다. 진통제 때문에 머리가 이상한 거다.
시선을 내렸다. 내 몸을 보려고.
그때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
이불 위로 솟아 있었다. 분명하게. 부드러운 곡선.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뭐지?
이불 아래의 윤곽이 이상했다. 작았다. 내 체구가 아니었다. 어깨가 좁았다. 이불 위로 나온 팔이 가늘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팔. 그 손목이 — 내 손목이 아니었다.
여자 손이었다.
심장이 뛰었다. 모니터가 빨라졌다. 삐삐삐삐삐—
뭐야 이게.
눈이 더 크게 떠졌다. 이불 아래로 허리가 잘록했다. 골반이 넓었다. 다리가 가늘고 짧았다.
이건 내 몸이 아니야. 이건 —
"심박수 올라가고 있어요!"
"의식 완전 각성! 진정제 추가!"
차가운 것이 혈관으로 밀려왔다. 의식의 끈이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유리 너머 지수의 얼굴이었다.
어둠이 삼켰다.
***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커튼과 꽃무늬 벽지가 보이는 평범한 병실이었다. 창밖으로 나무가 보였다. 가지에 잎이 하나도 없었다. 겨울인가 보다.
문이 열렸다.
지수가 들어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 달려왔다.
"여보—!"
팔이 내 몸을 감쌌다. 지수가 나를 끌어안았다.
아.
아팠다.
피부가. 온몸의 피부가. 지수의 팔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데는 것 같았다. 옷 위로 안은 것뿐인데 전신에 전류가 흘렀다. 어깨, 등, 옆구리 — 닿는 면적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이를 악물었다. 참았다. 지수를 밀어내면 안 된다. 이 사람이 얼마나 걱정했을까. 유리 너머에서 매일 나를 지켜봤을 텐데. 이제 드디어 만질 수 있게 됐으니까.
참아. 참아, 김준우. 지수를 위해서.
영겁 같은 시간이 흘렀다. 지수가 몸을 떼었다. 대신 내 손을 잡았다. 손도 아팠다. 하지만 참을 만했다.
"어때? 많이 아파?"
지수의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괜찮아."
목소리가 나왔다. 내 목에서. 높고 맑은 소리. 여자 목소리.
익숙해지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
지수가 웃으려 했다. 입꼬리를 올렸다가 — 다시 울었다.
"미안...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 거야. 머리를 풀고 왔다. 화장을 했다. 평소보다 진하게.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아이라인이 그어져 있었다.
옷도 예뻤다. 크림색 블라우스에 검은 슬랙스. 갈색 앵클부츠. 지수한테 잘 어울렸다.
퇴원하면 더 예쁜 거 사줘야지. 백화점에서.
잠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남편이 아내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근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예전에도 지수를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 뭐랄까. 감탄? 동경? '나도 저렇게 꾸미면 예쁠까' 같은 —
아니, 뭔 소리야.
고개를 흔들었다. 약 때문이다. 진통제 때문에 머리가 이상한 거다.
***
의사가 왔다.
중년의 남자였다. 흰 가운에 청진기를 걸고 차트를 들고 있었다. 설명이 길었다.
"현재 환자분의 뇌는 여성형 바이오 바디, F-72에 이식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되었다고 했다.
뇌 이식. 자율주행 화물차. 화학물질 유출. 전신 장기부전. 골든 타임.
단어들이 귀를 스쳐 지나갔다. 하나하나 이해가 됐다가 전체가 합쳐지면 이해가 안 됐다.
"환자분의 뇌는 33년 동안 180cm의 남성 신체에 최적화된 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식된 F-72 바디는 168cm의 여성 신체입니다."
의사가 태블릿 화면을 보여줬다. 팔 길이, 다리 길이, 무게 중심, 근육량. 모든 불일치 구간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뇌가 '컵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리면, 뇌는 기존의 긴 팔을 예상하고 근육을 움직입니다. 하지만 실제 팔은 짧고 근육 반응 속도는 다르죠. 그래서 허공을 휘젓거나 물건을 떨어뜨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구나. 아까 물 한 잔 마시려다가 얼굴에 쏟은 이유가 그거였구나.
"그리고 현재 느끼시는 피부의 통증. 그것도 오류가 아닙니다."
"옷이 닿기만 해도 아픈데요?"
"F-72 모델의 피부는 일반인보다 신경 말단이 4배 더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4배. 그래서 지수가 안아줬을 때 그렇게 아팠던 거다.
"왜 그렇게 만든 거죠?"
의사가 잠시 말을 고르더니 태블릿을 조작했다. 화면에 세포 내부 구조가 떴다. 미토콘드리아 옆에 낯선 구조물이 보였다.
"F-72 바디의 세포 안에는 일반적인 세포 소기관 외에 인공적으로 설계된 'T-오가넬'이 공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바디가 노화하지 않는 비밀입니다."
화면이 확대되었다. 작은 구조물이 염색체 끝을 수선하고 있었다.
"T-오가넬은 텔로미어를 지속적으로 수선합니다. 세포 분열 때마다 짧아지는 텔로미어를 복구해서 노화를 막는 거죠.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뭔데요?"
"에너지입니다. 불멸의 세포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T-오가넬은 신경계에서 발생하는 전기 신호, 즉 활동 전위를 연료로 사용합니다."
의사가 그래프를 띄웠다. 신경 자극과 T-오가넬 활성도의 상관관계였다.
"그래서 F-72는 의도적으로 감각 수용체를 일반인의 4배 가량 예민하게 증폭시켜 설계되었습니다. 끊임없이 고밀도의 신경 자극 데이터를 생성해서 T-오가넬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겁니다."
"그럼... 이 통증도?"
"네.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적응이 완료되면 같은 자극이 '통증'이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재분류됩니다. 하지만..."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한 가지 경고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도한 감각 자극이 지속되면 뇌에 '감각 과부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감각 정보가 폭주하면 뇌는 보호 메커니즘으로 전두엽 기능을 일시적으로 셧다운시킵니다."
"무슨 뜻이죠?"
"이성적 판단 능력이 마비되고 본능과 감각만 남는 상태가 됩니다. 우리는 이걸 '뉴럴 쇼크'라고 부릅니다. 극도로 강한 자극 상황에서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수가 내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호르몬 변화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사가 그래프를 띄웠다.
"이 바디에는 생체합성 난소가 있습니다. 여성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옥시토신. 환자분의 뇌는 33년간 테스토스테론 중심의 호르몬 환경에서 작동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완전히 다른 호르몬 체계에 놓이게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감정 기복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나거나,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그리고..."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성적 반응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남성의 성적 흥분은 시각적이고 국소적입니다. 하지만 여성 호르몬 환경에서는 흥분이 전신으로 퍼지고, 감정적 연결이 중요해지고, 반응 곡선 자체가 달라집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시간이 지나면 생각하는 방식, 느끼는 방식, 욕망하는 방식 모두 변할 수 있습니다."
변한다고? 내가?
"그리고 환상지 증후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없는 팔다리를 느끼는 거. 그건 알고 있었다.
"환자분의 경우, 남성 성기에 대한 환상 감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없는 부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반대로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공허함이 밀려올 수 있습니다."
이미 느끼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을 뿐.
"이 현상은 3에서 6개월에 걸쳐 서서히 사라집니다."
사라진다고? 그 감각이? 그러면 나는 — 완전히 이 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건가?
"마지막으로, 재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사가 화면을 넘겼다. 'Rapid Injection'이라는 글자가 떴다.
"원칙적으로는 12주간의 재활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최근 개발된 고속 주입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단축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지수가 물었다..
"F-72 바디를 사용한 수많은 환자들의 운동 신경 패턴을 수집해서 최적화된 신체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128개의 나노 전극을 두피에 부착하고, 이 패턴을 뇌에 직접 주입합니다."
"그러면?"
"시술 후 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지수가 나를 쳐다봤다. 나도 지수를 쳐다봤다.
"다만 명심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의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기계적인 움직임과 신체 감각은 완벽하게 주입됩니다. 하지만 마음은 주입할 수 없습니다. 감정적 수용, 정체성의 혼란. 이건 환자분이 감당하셔야 합니다."
"해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주입, 받겠습니다. 지금 제게 필요한 건 내가 걸어서 이 병원을 나가는 능력이니까요."
목소리는 낯선 여자의 미성이었지만, 말투만큼은 내 것이었다.
***
두피에 차가운 것들이 하나씩 붙었다. 의사가 뭔가를 눌렀다. 졸음이 밀려왔다.
깨어났다.
달랐다.
눈을 뜨자마자 알았다. 이불의 무게가 느껴졌다. 어디에 얼마만큼 눌리고 있는지 정확히.
손을 들었다.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떨림 없이. 어제까지 허공을 헤매던 이 손이.
여전히 작았다. 여전히 하얀 여자의 손이었다. 하지만 내 것 같았다. 뇌가 보낸 명령과 손의 움직임 사이에 시차가 없었다.
물컵을 집었다. 잡혔다. 한 번에. 입으로 가져갔다. 삼켰다.
해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 감격하다니.
오후에 일어서봤다.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버텼다. 체중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작아졌다.
아니 — 내가 작아진 거였다. 간호사의 얼굴이 올려다보였다. 178cm의 남자 간호사를. 나는 올려다보고 있었다. 168cm. 12cm가 빠졌을 뿐인데 세상의 원근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 혼자.
변기 앞에 섰다. 습관대로. 뚜껑을 올리려다가 —
멈췄다.
아. 그렇지. 이제는 앉아야 하는 거구나.
서서 할 수 없는 몸이었다. 구조가 다르니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변기 뚜껑을 내렸다. 앉았다.
너무 불편했다. 자세가 어색했다. 33년간 서서 했는데. 앉으니까 허벅지가 차가운 변기에 닿고, 뭔가 굴욕적이었다.
병실로 돌아가 천장을 바라봤다.
대체 여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던 거지? 매번 앉아야 하고, 이 불편한 몸으로.
아니, 그건 태어날 때부터 익숙한 거니까. 하지만 나는 다른 걸 안다. 서서 10초면 끝나는 세상을 안다.
빨리 남자 몸으로 바꿔야겠다. 재고가 없다고 했나? 기다리지 뭐. 이 몸은 임시야. 임시.
***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문제가 있었다.
"여보... 입을 옷이 없어."
사고 때 입었던 양복은 갈기갈기 찢겼다. 집에 있는 내 옷은 105 사이즈 셔츠, 34인치 바지. 이 몸에 걸치면 텐트가 될 거였다.
지수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일단 이거 입어. 제일 넉넉하고 편한 걸로 샀어."
여성용 트레이닝복이었다. 베이지색. 아니 — 핑크가 살짝 감도는 베이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입었다.
헐렁한 트레이닝복인데도 곡선이 드러났다. 남자의 옷은 각을 잡아주는데, 여자의 옷은 곡선을 드러내는 거였다.
병원 문을 나서자 바람이 불었다.
"춥다..."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전에는 이 정도 바람에 춥지 않았는데. 이 몸은 얇았다. 바람이 옷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지수가 자기 코트를 벗어 내 어깨에 덮어줬다. 따뜻했다. 지수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차에 탔다. 조수석.
예전에는 내가 운전석이었다. 지수가 조수석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움직였다. 자율주행. 창밖으로 도시가 흘러갔다.
신호 대기 중에 지수가 내 손을 잡았다.
"걱정 마. 다 괜찮아질 거야."
지수의 눈이 웃고 있었다. 그 눈이 크게 보였다. 내 시선의 높이가 낮아져서 그런 건가.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우리 집 냄새. 신발장 위에 내 구두가 놓여 있었다. 265mm. 저 구두를 신을 일은 이제 없었다.
침대에 누웠다. 우리 집 침대. 익숙한 매트리스의 탄력.
살아있다.
그 느낌이 비로소 왔다. 내 집에서. 내 침대에서.
지수가 침대 옆에 앉아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긴 머리카락. 베개 위에 펼쳐진.
"지수야."
"응."
"고마워."
목소리가 떨렸다.
"나 정말 무서웠어. 당신이 없었으면..."
말끝을 잇지 못했다.
지수가 내 얼굴을 감싸더니 — 입술을 맞췄다.
머릿속에 불꽃이 터졌다.
하얗게.
1초. 2초. 지수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촉촉했다.
조금만 더.
그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지수가 떨어졌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 아쉬웠다. 전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지수와 수천 번 키스했다. 익숙한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 이건 내가 알던 키스가 아니었다.
지수의 입술이 달라진 게 아니었다. 내 입술이 달라진 거였다. 감촉이 확대되어 들어왔다. 지수의 입술 표면의 미세한 결까지. 체온의 농도까지. 숨결의 습도까지.
지수가 이마에도 입을 맞췄다. 가볍게.
그것만으로도 전류가 흘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잔물결이 퍼지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이 감각이. 이 예민함이. 이 몸이.
하지만 동시에 — 어딘가 깊은 곳에서 — 안도감도 있었다. 지수가 옆에 있다는 것. 이 사람의 손길이 통증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게 더 무서웠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이 몸은 임시니까. 곧 바꿀 거니까. 남자 몸으로. 원래대로.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으니까.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겨울이었다. 눈이 녹지 않은 겨울.
눈을 감았다. 지수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 손길 하나에 온몸이 반응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