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철 : 링크
현철 : 링크
연구소장실 창밖으로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아가 떠난 지 30년이 됐다. 긴 시간이었다. 아내를 살리지 못한 남편이 딸만이라도 살리겠다고 실험실에 틀어박혀 보낸 30년. T-오가넬은 거의 완성됐지만, 마지막 관문이 나를 막고 있다. 텔로미어 제어 문제가 3년째 풀리지 않는다.
봄이 오고 있었다. 새 생명이 움트는 계절인데, 마음은 무거웠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 때문이다.
준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위에게 이런 짐을 지우려 하다니.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윌리엄이 움직이기 전에 레시피를 안전한 곳에 옮겨야 한다. 준우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준우가 들어왔다. 내 사위. 지수의 남편. 결혼한 지 2년이 됐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 착하고 친절한 사람. 준우를 지수에게 소개해준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박사님, 안녕하셨어요?"
"앉아요."
소파를 가리켰다. 준우가 앉았다.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비서가 커피를 가져왔다. 준우가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여유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긴장하지 않는 사람. 당당한 사람.
"지수 얘기를 하려고 불렀어요."
"지수는 잘 지내죠. 연구소 매일 출근 하는데, 매일 보시지 않으신가요?"
"아니요 그런 이야기 말고 오늘은 좀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오라고 했어요."
준우의 눈이 살짝 변했다.
"MELAS 말씀이십니까?"
"알고 있었나요..."
"네. 결혼 전에 지수한테 들었습니다."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물었다.
"그걸 알면서 결혼했어요?"
"네."
"왜요?"
준우가 나를 바라봤다.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지수를 사랑하니까요."
"병이 발병하면 힘들어져요. 준우 씨 인생이."
"알고 있습니다."
"발작이 올 수 있어요.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간병이 필요해지고. 그래도요?"
"그래도요."
준우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박사님. 저도 알아봤습니다. MELAS가 뭔지. 어떻게 진행되는지. 발병하면 어떻게 되는지."
준우가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미토콘드리아 유전병이죠. 세포의 에너지 공장에 결함이 생기는 병. 뇌, 근육, 심장.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장기부터 망가진다고 들었습니다."
"..."
"발병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더군요. 30대에 발병할 수도 있고, 50대에 발병할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평생 발병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
"그렇죠."
"그리고 발병해도 잘 관리하면 오래 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약물 치료, 생활 습관 관리, 정기 검진. 발병이 곧 사형선고는 아니라고요."
준우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저는 지수와 함께 늙고 싶습니다. 발병하든 안 하든. 10년을 살든 50년을 살든. 함께 있고 싶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아를 잃기 전에 나도 그런 말을 했었다. 함께 늙자고. 그때는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줄 몰랐다.
"고마워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준우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수를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빗소리만 들렸다. 창밖에서.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
"준우 씨."
"네."
"내 연구에 대해 얘기해줄 게 있어요."
준우의 눈이 진지해졌다.
"T-오가넬이라고. 내가 30년간 연구해온 프로젝트예요."
"미토콘드리아 대체 치료제 아닙니까? 보고서에서 봤습니다."
"맞아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창밖을 바라봤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내 모든 연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수를 위한 거였어요."
준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듣고 있었다.
"수아가, 지수 엄마가 MELAS로 죽었어요. 3년간 투병하다가. 지수가 태어난 직후에."
"..."
"그때 다짐했어요. 지수한테는 같은 일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반드시 치료제를 만들겠다고."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입이 말랐지만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미토콘드리아가 고장 나면 세포가 에너지를 못 만들어요. 그래서 죽어가는 거예요. 지수 엄마가 그랬어요. 몸이 서서히 꺼지는 거예요. 불 나간 방처럼."
준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T-오가넬은 그 고장 난 미토콘드리아를 대체하는 인공 소기관이에요. 다만 에너지를 만드는 방식이 달라요. 산소를 태우는 게 아니라 신경계의 전기 신호를 포획해서 에너지원으로 써요."
"신경의 전기 신호를요?"
"네. 뇌와 신경에서 발생하는 활동 전위를. 이미 실험으로 증명했어요. 결함 있는 미토콘드리아를 대체해서 세포에 에너지를 다시 공급할 수 있어요."
준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고 있었다.
"그럼 지수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아직 안 돼요."
준우의 말을 잘랐다.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째. 이 치료제는 발병한 후에 써야 해요."
"왜요?"
"T-오가넬은 신경 신호를 연료로 쓴다고 했죠. 그래서 환자의 신경계에 맞춰서 보정해야 해요. 신호를 너무 많이 가져가면 신경계가 손상되고, 너무 적게 가져가면 치료 효과가 없어요. 그 균형점을 찾으려면 환자의 현재 상태를 정밀하게 측정해야 해요."
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병 전에는 어느 장기가 얼마나 손상될지 알 수가 없어요. 뇌가 먼저 망가질 수도 있고, 심장이 먼저일 수도 있고, 근육일 수도 있어요. 발병 후에야 어디에 얼마나 투입해야 하는지 계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수는..."
"아직 발병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쓸 수가 없어요."
"..."
"둘째. 더 큰 문제예요."
"T-오가넬은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만이 아니에요. 확보한 에너지로 텔로미어를 재생하는 기능도 있어요."
"텔로미어요? 노화와 관련된 그것 말입니까?"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짧아지는 구조물이에요. 다 닳으면 세포가 죽어요. T-오가넬이 그걸 재생하면 세포가 계속 분열할 수 있어요. 이론적으로는 끝없이."
준우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분열을 멈추지 않는 세포가 뭔지 알아요?"
"..."
"암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텔로미어 수선이 제어되지 않으면, 치료제가 아니라 전신에 종양을 심는 거예요. 모든 세포에 동시에."
준우가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하셨습니까?"
"못 했어요. 3년을 더 매달렸는데, 제어 스위치를 만들었다가 실패하고, 또 만들었다가 실패하는 반복이에요."
창밖을 바라봤다. 빗줄기 사이로 먼 산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래서 조마조마해요. 지수가 발병하면 이 상태로는 쓸 수가 없어요. 쓰면 살릴 수도 있지만 죽일 수도 있어요. 그런 도박을 내 딸한테 할 수는 없어요."
***
"그리고 윌리엄 얘기를 해야겠어요."
준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칼릭스의 CEO, 내 동료이자 경쟁자.
"윌리엄은 T-오가넬을 알고 있어요. 처음부터 함께 시작한 프로젝트니까요. 하지만 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요."
"왜요?"
"윌리엄이 이걸 손에 넣으면 영생의 약으로 팔 거예요."
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MELAS 치료제가 아니라?"
"치료제로도 팔겠죠.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에요. 텔로미어 재생 기능을 분리해서 따로 상품화할 거예요. 노화 방지제. 영생의 약. 전 세계 부자들이 줄을 설 거예요."
"..."
"수아가 죽어갈 때 생각했어요."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 적이 없었다.
"죽어가는 아내 옆에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한 시간만 더, 하루만 더. 끝이 안 오면 좋겠다고."
준우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끝이 와야 해요. 끝이 안 오면 아무것도 소중하지 않아요. 수아와 보낸 시간이 그렇게 빛나는 건, 그 시간이 유한했기 때문이에요."
"..."
"윌리엄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한테는 시간이 상품이에요."
"그래서 레시피를 준우씨에게 맡겨 놓으려고 해요."
준우가 눈을 크게 떴다.
"저에게요?"
"준우 씨만 찾을 수 있는 방법으로."
내가 말했다.
"이젠 회사 서버에도 없고, 내 컴퓨터에도 없어요. 윌리엄이 아무리 뒤져도 못 찾을 거예요."
"저만 찾을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자세한 건 때가 되면."
준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
"준우 씨."
"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준우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만약의 경우예요. 아무 일도 안 생기겠죠. 하지만 이런 연구를 하다 보면 적이 생기기도 해요. 이 기술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
"만약, 정말 만약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준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수를 부탁해요."
준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이유진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이에요."
"이유진 수석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에요.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사람을 찾아가요. T-오가넬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그 사람도 알고 있어요."
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겠습니다."
준우가 일어서려 했다. 여기서 보내면 안 됐다.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아, 그리고 이것 좀 봐요."
회의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은색 헤드셋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준우가 다가왔다.
"이건 뭡니까?"
"신세틱 링크라고. 회사에서 테스트 중인 신제품이에요."
헤드셋을 들어 보여줬다. 관자놀이와 귀 뒤쪽에 닿는 전극 센서가 달려 있었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예요. 감각 신경의 전기 신호를 캡처해서 다른 사람한테 전송하는 장치예요. 내가 느끼는 촉각, 온도, 심장 박동. 그걸 상대방이 그대로 느낄 수 있어요."
"실시간으로요?"
"네. 무선이고 지연도 거의 없어요. 재미있어요. 한번 시험해 볼래요?"
목소리가 가벼워야 했다. 자연스러워야 했다.
준우의 눈이 반짝였다.
"재미있겠군요. 한번 해볼게요."
두 사람이 헤드셋을 착용했다. 내가 장치를 켰다.
"자, 제가 손등을 만져볼게요."
내 손가락이 왼손 손등을 쓸었다. 준우가 눈을 크게 떴다.
"느껴져요. 진짜로. 제 손등을 누가 만지는 것 같아요."
"신기하죠?"
준우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오른손 검지가 헤드셋 옆면의 작은 버튼을 눌렀다. 데이터 전송 버튼. 준우의 눈은 자기 손등에 가 있었다.
잠시 후 헤드셋을 벗었다. 준우가 감탄했다.
"이거 상품화되면 대박 나겠는데요. 주가에도 영향이 클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내부 정보만 아니면 주식 사고 싶네요."
준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웃어 보였다.
준우가 인사를 하고 문을 열었다. 곧은 어깨, 단단한 걸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이 닫혔다.
의자에 앉았다. 창밖을 봤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준우는 모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의 뇌에 무엇이 새겨졌는지.
커피가 식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