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 그녀, 내남편(6)

유진 : 족쇄

by 빌리박


유진 : 족쇄


오후 3시 47분, 사내 메신저에 알림이 떴다.


연구실 창밖으로 여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6월의 햇빛은 유독 강렬했다. 실험 데이터를 정리하던 나는 화면 구석에 뜬 작은 팝업 창을 무심코 바라봤다. 그리고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손이 멈췄다.


윌리엄 CEO.


연구소에서 14년을 일했다. 연구원으로 들어와 수석 연구원이 되기까지, 무수한 프로젝트를 거쳤다. 그러나 그 긴 시간 동안 윌리엄과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전사 회의에서 멀리 단상 위의 얼굴을 본 것이 전부였다. 은발에 가까운 금발, 서양인 특유의 깊은 눈, 단호한 턱선. 그는 언제나 멀리 있는 존재였다.


'잠시 제 방에서 뵐 수 있을까요?'


메시지는 짧았다. 그리고 정중했다. 그러나 그 정중함이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켰다. 무언가 잘못된 것인가. 머릿속에서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빠르게 검토했다.


인사 문제인가. 최근 승진 심사에서 탈락한 연구원이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 관할이 아니었다. 프로젝트 관련인가. 내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적어도 보고서상으로는.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


불안했다. 그러나 CEO의 호출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실험 데이터를 저장하고, 모니터를 껐다.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햇살이 눈부셨다.


***


대표실은 건물 최상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복도를 지나가는 동료 연구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가볍게 목례를 했고, 나도 같은 동작으로 답했다. 일상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낼까 봐 의식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며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기계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좁은 공간 안에서 나는 혼자였다. 벽면의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30대 후반의 여자. 단정하게 묶은 긴 머리, 피곤해 보이는 눈, 굳은 입술. 연구원의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밤새 실험실에 틀어박혀 데이터와 씨름하는 삶. 그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적어도 혜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연구동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멀리 한강이 반짝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비서가 나를 맞았다. 젊은 여성이었다. 단정한 정장, 완벽한 미소. 그녀는 나를 복도 끝으로 안내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가 인터폰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곧 육중한 원목 문이 열렸다.


***


방 안은 미니멀했다.


넓은 공간에 비해 가구는 적었다. 한쪽에 대형 책상이 있었다. 검은 가죽 의자, 정리된 서류, 얇은 노트북 한 대. 책상 뒤로는 통유리 창이 있었고,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회의용 테이블과 소파가 배치되어 있었다. 아이보리색 가죽 소파, 낮은 유리 테이블, 그 위에 놓인 커피잔 세트. 벽에는 그림 한 점 없이 깔끔했다. 장식이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장식처럼 느껴졌다. 권력자의 공간이 주는 특유의 위압감이 있었다.


윌리엄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까이서 보니 키가 더 커 보였다. 180 후반은 되어 보였다. 은발에 가까운 금발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빛났다. 날카로운 눈매. 서양인 특유의 깊은 눈동자. 그러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딘가 모순적인 인상이었다.


"이유진 수석. 와줘서 고마워요."


그의 한국어는 유창했다. 억양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칼릭스 바이오의 한국 지사를 이끈 지 15년. 그 시간이 그를 이 나라에 적응시킨 것이리라.


"앉아요."


그가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소파는 부드러웠지만, 나는 등을 곧게 세운 채로 앉았다. 긴장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비서가 커피를 가져왔다. 은은한 향이 퍼졌다. 고급 원두였다. 그녀가 조용히 물러가자,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윌리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어때요? 일은 잘 되고 있어요?"


가벼운 질문이었다. 세상 모든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할 법한 질문. 그러나 그의 눈동자가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탐색하는 시선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네, 별일 없습니다. 프로젝트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요."


별일이 있었다. 아주 큰 일이.


서혜인. 내 연인. 이 연구소에서 만난 사람. 5년 전, 신입 연구원으로 들어온 그녀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호기심 가득한 눈, 밝은 미소, 끝없이 질문하는 열정. 그녀는 연구실의 공기를 바꾸는 사람이었다.


함께 밤새 실험을 하고, 새벽에 편의점 라면을 나눠 먹고, 논문을 함께 읽으며 토론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리는 연인이 되어 있었다. 함께 미래를 약속했다. 연구소를 나가면 작은 집을 얻어 살자고.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주겠다고. 늙어서도 함께 논문을 읽자고.


그녀가 지금 죽어가고 있었다.


췌장암. 4기. 시한부 3개월.


담당 의사가 선고한 시간이었다.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마치 기상예보를 전하듯이.


요즘 나는 일에 손이 잡히지 않았다. 실험 데이터를 보다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었다. 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는 얼굴, 찡그리는 얼굴, 집중할 때의 진지한 얼굴. 그 얼굴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특히 은현철 박사에게는.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연구실 안에서 사적 감정을 만들지 마라. 감정이 개입되면 데이터가 흐려진다. 예전에 그분 밑에서 사귀다 팀을 망친 선배 연구원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혜인이 앉아 있는데도.


"그래요? 다행이네요."


윌리엄이 커피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잔이 유리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다.


"사실 오늘 유진 씨를 부른 건,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예요."


"도움이요?"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서혜인 씨 말이에요."


커피잔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잔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지 않으면 쏟을 것 같았다.


"서혜인 씨와 유진 씨가 연인 관계라는 건 알고 있어요."


윌리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이.


어떻게 알았지.


조심했다. 연구소 안에서는 늘 조심했다.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동료로서 먹었다. 퇴근할 때도 따로 나갔다. 은현철 박사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됐다. 선생님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윌리엄이 알고 있다면, 선생님도 이미 알고 계신 걸까.


"그리고 그녀가 암 투병 중이라는 것도요. 시한부 3개월이라고 들었어요."


윌리엄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동정도 아니고, 조롱도 아닌 눈.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이었다.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섣불리 반응하면 더 많은 것을 들킬 수 있었다.


"우리 회사에서 실험 중인 F-71 바이오 바디가 있어요."


윌리엄이 말을 이었다.


"서혜인 씨의 뇌를 그 바디에 이식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어요."


F-71.


나는 그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나 역시 그 연구의 일부에 참여하고 있었으니까. 인공 신체에 인간의 뇌를 이식하는 기술.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이제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제한된 대상에게만 허용되는 기술이었다. 임상 실험 대상자 선정 기준은 까다로웠고, 비용 또한 천문학적이었다. 일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영역이었다.


"왜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건가요?"


턱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를 고르게 유지하려고 했다.


"무언가 대가가 있겠죠."


"똑똑하시네요."


윌리엄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눈까지 닿지 않았다.


"작은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면 돼요."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소파 가죽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요즘 은현철 박사가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 알고 싶어요. 그런데 박사님이 저한테는 말을 안 해줘요. 보고서에도 핵심적인 내용은 빠져 있고요."


은현철 박사.


내 스승.


14년 전, 아무것도 모르던 대학원생이었던 나를 연구소로 이끌어준 사람. 그때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학문의 길을 계속 갈 것인지, 기업으로 갈 것인지. 그는 나에게 말했다. "연구소에 와라. 네가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다. 내가 도와주겠다."


그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꿨다.


학문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내 친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돌아가셨다. 은현철 박사는 그 빈자리를 채워준 사람이었다. 연구를 가르쳐주고, 인생을 조언해주고, 힘들 때 묵묵히 옆에 있어준 사람.


그를 배신하라는 것인가.


"그건... 할 수 없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은현철 박사님은 저에게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배신할 수 없어요."


윌리엄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마치 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는 천천히 등을 소파에 기댔다. 여유로운 자세였다.


"배신이라. 강한 표현이네요."


그가 커피잔을 다시 들었다.


"저는 그냥 정보를 공유해달라는 거예요. 같은 회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인데, 공유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은현철 박사가 너무 폐쇄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서 문제예요."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같은 회사의 연구 프로젝트라면 경영진에게 보고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은현철 박사가 왜 정보를 숨기는지. 윌리엄이 왜 그 정보를 원하는지.


T-오가넬.


은현철 박사의 평생 연구. 미토콘드리아를 대체할 수 있는 인공 소기관. 그것이 완성되면 인류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연장할 수 있다. 노화를 늦추고, 질병을 예방하고, 어쩌면 영생에 가까운 삶도 가능해질 것이다.


윌리엄은 그것을 원한다. 그러나 은현철 박사는 윌리엄을 신뢰하지 않는다. 기술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세요."


윌리엄이 말했다.


"서혜인 씨의 목숨이 달린 문제예요. 3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죠. 그 시간 안에 결정하지 않으면,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요."


부드러운 말투였다. 부드러울수록 날이 섰다.


"저는... 못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혜인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요."


"다른 방법?"


윌리엄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들었다. 수술은 불가능하다고. 항암 치료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시간을 조금 벌 수 있을 뿐이라고.


"그래도 못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거절했다.


윌리엄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졌다. 그 아래에 있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그래요? 그럼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죠."


그가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섰다.


방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등 뒤로 그의 시선을 느꼈다.


"참, 한 가지만요."


문 앞에서 그가 돌아봤다. 역광을 받아 그의 얼굴이 어둡게 보였다.


"오늘 대화는 우리 둘만 아는 거예요. 만약 이 이야기가 은현철 박사에게 새어 나간다면..."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유진 씨의 미래는 없을 거예요. 연구소에서만이 아니라, 이 업계 전체에서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숙였다.


문이 열렸고, 나는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버튼을 누르려는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야 겨우 연구동 층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창백했다. 입술에 핏기가 없었다.


거절했다. 옳은 일이었다. 은현철 박사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건 내 원칙이었다.


그런데 그 원칙이 혜인을 살리지는 못한다.


어제 병원에서 본 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 달 전만 해도 활기차게 연구실을 돌아다니던 사람이었다. 밝게 웃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새벽까지 실험에 매달리던 사람. 지금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있었다.


볼이 푹 꺼지고 있었다. 손등에는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피부가 종이처럼 얇아졌다. 한 달 전에 비해 5킬로그램이 빠졌다. 음식을 먹으려 해도 구토가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방금 그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거절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문이 다시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대기 모드로 들어갔다.


***


그날 저녁, 나는 병원에 있었다.


서혜인의 병실. 병동 3층 312호. 창밖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주황빛이 하얀 침대 시트 위로 스며들었다. 병실은 조용했다. 생명유지장치의 규칙적인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혜인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건지, 기력이 없어서 눈을 뜨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예전에는 늘 따뜻했는데. 언제나 내 손보다 따뜻했는데.


"왔어?"


혜인이 눈을 떴다.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술만 조금 움직였을 뿐이었다.


"응. 왔어."


나는 억지로 웃었다.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오늘 어땠어?"


"괜찮았어. 오전에 검사 받았고... 오후에는 잤어. 많이 잤어."


혜인의 목소리는 가늘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또렷하고 힘 있던 목소리가, 이제는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았다.


담당 의사가 왔다가 나갔다. 젊은 의사였다. 안경 너머의 눈이 피로해 보였다. 그는 나를 복도로 불러냈다.


"보호자분이시죠?"


"네."


엄밀히 말하면 가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혜인은 가족이 없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형제도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그녀를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의사가 한숨을 쉬었다.


"주변 정리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주변 정리.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암이 빠르게 전이되고 있어요. 한 달... 어쩌면 그보다 짧을 수도 있습니다."


한 달.


3개월이라고 했던 시한부가, 어느새 한 달로 줄어 있었다.


"치료 방법은... 정말 없습니까?"


"유감입니다."


의사가 고개를 숙였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


병실로 돌아왔다.


혜인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이 거의 지고 있었다. 주황빛이 붉은빛으로, 붉은빛이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유진아."


혜인이 불렀다.


"응."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울지 마."


그제야 내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부터 흘렀는지 몰랐다. 닦으려 했지만 계속 흘러내렸다.


"괜찮아. 나 괜찮아."


혜인의 손이 내 뺨을 쓸었다. 힘이 없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손길이었다.


"내 짧은 인생이... 네가 있어서 행복했어."


"그런 말 하지 마."


울음을 삼켰다. 목이 조여왔다.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방법을 찾을 거야. 반드시."


"유진아."


혜인이 미소를 지었다. 힘없지만,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진심이야. 너 만나서... 정말 좋았어. 이 연구소에 와서... 너를 만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일이었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나도 그래."


간신히 말했다.


"너 만나서 행복했어. 앞으로도... 앞으로도 행복할 거야. 함께."


혜인이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고르게 이어졌다. 잠든 것이었다. 약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금세 잠에 빠지곤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이 보랏빛에서 검은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그것만이 선명했다. 나머지는 전부 흐려졌다.


***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병실 의자에 앉아 혜인의 손을 잡은 채로 밤을 보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윌리엄의 제안. 은현철 박사. 혜인. 세 가지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갔다.


은현철 박사를 배신할 수 있을까.


14년이었다. 14년 동안 그의 밑에서 배웠다. 연구 방법론, 실험 기술, 논문 작성법.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연구자로서의 자세, 과학자의 윤리, 인간으로서의 태도. 그는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힘들 때마다 그가 곁에 있었다. 실험이 실패할 때, 논문이 거절당할 때, 자신감을 잃을 때. "괜찮아. 다시 하면 돼. 실패는 과정이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 사람을 배신할 수 있을까.


그러나 혜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한 달. 어쩌면 그보다 짧은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그냥 죽는다. 차갑게 식어가고, 흙 속에 묻히고, 영원히 사라진다.


동이 텄다.


병실 창문으로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혜인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고요한 병실에 울렸다.


미안합니다, 선생님.


밤새 몸부림친 끝에 남은 것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윌리엄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답장은 즉시 왔다. 문자가 아닌 전화였다.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현명한 결정이에요."


윌리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놀라움도, 기쁨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서혜인 씨의 F-71 이식 수술은 제가 책임지고 진행할게요. 최고의 팀을 배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기계적으로 나왔다.


"그전에 한 가지 절차가 있어요."


윌리엄이 말을 이었다.


"제2연구동 304호로 가세요. 간단한 시술을 받으면 돼요."


"시술이요? 그게 뭔가요?"


"그저 작은 송신기일 뿐이에요."


송신기.


그러나 물을 수 없었다. 이미 발을 들인 것이었다.


"안심하고 받으세요. 아프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손바닥에 땀이 차 있었다. 폰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닦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


제2연구동 304호.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별관이었다. 임상 실험실들이 모여 있는 곳. 일반 연구원들은 잘 오지 않는 구역이었다.


복도를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아는 얼굴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304호 앞에 섰다. 평범한 철문이었다.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와 여자. 의료진처럼 보였다. 중앙에는 수술대와 비슷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기울어진 등받이, 머리 받침대, 팔걸이. 치과 의자와 비슷했다. 옆에는 각종 의료 장비가 배치되어 있었다. 모니터, 기계 팔, 주사기들.


"이유진 수석이시죠?"


남자가 물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안경을 쓰고 있었다.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네."


"앉으세요."


그가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앉았다. 가죽이 차가웠다. 등을 기대자 의자가 자동으로 기울어졌다.


"간단한 시술이에요."


남자가 설명을 시작했다.


"목 뒤쪽 헤어라인 안쪽에 작은 임플란트를 삽입할 거예요. 1센티미터 정도의 절개만 필요해요. 국소 마취를 할 거라 아프지 않을 거예요."


"임플란트요?"


"통신용 장치예요."


남자가 트레이에서 작은 물체를 집어들었다. 쌀알 크기의 금속 조각이었다. 은색으로 반짝였다.


"위치 추적과 생체 신호 모니터링 기능이 있어요."


그의 설명은 사무적이었다. 마치 일상적인 절차를 설명하듯이.


나는 과학자였다. 그가 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알아두셔야 할 게 있어요."


남자가 주사기를 준비하며 말했다.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 임플란트는 척추 신경이 뇌로 이어지는 통로, 뇌간 근처에 정교하게 연결돼요."


그가 의자 옆 모니터를 켰다. 뇌와 척추의 단면도가 나타났다. 그가 손가락으로 특정 부위를 가리켰다.


"여기예요. 신경과 너무 깊게 얽히기 때문에, 한 번 삽입하면 제거가 불가능해요."


제거 불가능.


"억지로 빼려고 하면 뇌 손상을 입을 수 있어요. 운동 장애, 감각 이상, 심하면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죠."


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경고라기보다는 단순한 정보 전달 같았다.


평생이다.


평생 이것을 달고 살아야 한다. 윌리엄의 감시 아래. 언제든 내 위치를 추적당하고, 내 상태를 모니터링당하고.


"동의하시겠어요?"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혜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병실에서 본 수척한 얼굴. 힘없이 웃던 미소. "네가 있어서 행복했어"라고 말하던 목소리.


"빨리 하시죠."


나는 말했다. 목소리는 의외로 단단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앞으로 숙이게 했다. 목 뒤가 드러났다. 차가운 소독약이 피부에 닿았다.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취합니다."


바늘이 피부를 뚫었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곧 목 뒤쪽이 저릿해지며 감각이 사라졌다.


눈을 감았다.


은현철 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온화한 눈, 깊은 주름, 부드러운 미소. "괜찮아. 다시 하면 돼."


선생님이 이걸 아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그 생각을 밀어냈다.


목 뒤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기계음이 났다. 절개, 삽입, 봉합. 모든 과정이 몇 분 만에 끝났다.


"끝났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다. 천장의 형광등이 눈부셨다. 의자가 천천히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하루 정도 뻣뻣한 느낌이 있을 거예요. 이틀 후에 봉합사는 자연 흡수됩니다."


남자가 거울을 건넸다. 목 뒤를 비춰봤다. 머리카락 아래, 작은 절개 자국이 보였다. 벌써 접착제로 봉합되어 있었다. 일주일이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에 있는 것은 평생 남는다.


나는 거울을 내려놓았다.


"다 됐습니다. 가셔도 돼요."


남자가 문을 열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목이 조금 뻣뻣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적어도 몸에는.


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봤다. 남자와 여자가 다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미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수많은 시술 대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복도를 걸었다.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목 뒤가 묵직했다. 무게가 느껴질 리 없는 쌀알 크기의 금속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혜인아.


기다려. 살려줄게. 반드시.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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