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 적응
지수 : 적응
새벽 1시. 거실 시계의 초침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 끝에 웅크린 채 두 시간째 같은 자세였다. 무릎을 끌어안은 팔이 너무 가늘어서, 자기 몸을 붙잡는 것조차 불안해 보였다. 나는 소파 반대편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울음은 이미 그쳤다. 그치고 난 뒤가 더 무서웠다. 울 때는 적어도 감정이 밖으로 나왔다. 지금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눈이 어딘가를 보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그 생각이 초침 소리에 맞춰 돌아왔다. 동의서에 서명한 손. 그 손이 이 사람의 인생 전부를 바꿨다.
"씻자. 너무 늦었다."
내가 먼저 정적을 깼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밝게 나왔다.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무언가를 덮으려는 목소리라는 것을.
그는 퉁퉁 부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부축하며 욕실로 향했다. 내 어깨에 올려진 그의 팔이 가벼웠다. 예전에는 그의 팔 하나가 내 어깨를 완전히 덮었다. 지금은 손끝이 어깨 중간에도 닿지 않았다.
***
욕실 문을 열자 차가운 타일 바닥이 발끝에 닿았다. 샤워기를 틀어 온도를 맞췄다. 물이 따뜻해지자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그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 그가 숨을 들이켰다. 짧고 날카롭게.
"뜨거워?"
"아니... 뜨겁진 않은데..."
고개를 저었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물을 맞았다. 적응하려는 듯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꾸 예전 모습을 겹쳐 보았다. 물을 맞으며 눈을 감는 습관은 같았다.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는 각도도. 하지만 물이 닿는 면적이 달랐다. 예전에는 넓은 등판 위로 물이 퍼졌다. 지금은 좁은 어깨에서 금방 흘러내렸다.
비누를 집어 거품을 냈다. 그의 등 뒤로 돌아가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여보... 내가 할게."
그가 몸을 움츠리며 내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허리 근처에서 멈춰 있었다. 자기 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멈춤이었다.
"가만히 있어. 당신 아직 익숙지 않잖아."
내 손이 그의 등을 문지르기 시작하자 등 근육이 잔뜩 경직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의지와 상관없다는 듯이 풀렸다. 숨이 깊어졌다. 이상했다. 등을 밀어주는 것뿐인데, 반응이 너무 컸다. 퇴원 직후라 예민한 걸까.
손바닥 안에서 전해지는 감촉이 낯설었다. 척추 라인이 또렷하게 느껴졌고, 견갑골이 손바닥 아래서 움직였다. 예전에는 등을 밀어줄 때 근육의 저항이 있었다. 단단한 것 위를 미끄러지는 느낌. 지금은 손바닥이 뼈에 닿을 것 같았다.
손이 옆구리를 지나 앞으로 향하다가, 내 손이 그의 가슴에 닿았을 때.
"흐읏..."
그가 짧은 신음을 삼켰다. 움찔하며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눈이 커졌다. 자기 입에서 나온 소리에 놀란 표정이었다.
나도 손을 멈췄다. 몇 초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샤워 물소리만 욕실에 울렸다.
"미안."
내가 먼저 말했다. 손을 뗐다.
"아니야... 그냥 놀라서."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팔로 자기 가슴을 감싸 안았다. 자기 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세. 그 모습이 가슴을 찔렀다.
***
목욕을 마친 후, 그에게 면 가운을 건넸다. 예전에 그가 입던 남성용 가운은 이미 없었다. 퇴원 준비를 하면서 내가 가져온 것은 내 옷들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 가운을 입히는데, 어깨가 맞지 않아 한쪽이 흘러내렸다.
거울 앞에 서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었다. 따뜻한 바람이 긴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거울 속 그의 얼굴. 축 처진 어깨, 초점 잃은 눈동자.
"이건... 정말 내가 아닌 것 같아."
그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말했다. 울먹임도 아니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목소리에 가까웠다.
"거울 볼 때마다 낯선 여자가 있어. 눈을 깜빡이면 저 여자도 깜빡여. 손을 들면 저 여자도 들어. 근데... 저건 내가 아니야. 내 얼굴이 아니야."
"당신은 여전히 김준우고, 내 남편이야."
드라이기를 끄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생각했다. 이 사람이 저 거울 앞에서 느끼는 공포를, 내가 만들었다는 것을.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당연하지. 너무 쉽게 나온 대답이었다. 당연한 게 어디 있나.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침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그가 나를 불렀다.
"지수야..."
"왜?"
"나... 당신한테 해주고 싶은 게 있어."
복도의 간접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당신 힘들었지? 나 없는 동안... 혼자서..."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아니, 신경 써. 당신은 내 아내잖아. 남편이 아내를 챙기는 건 당연한 거야."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작고 차가웠다. 내 손을 잡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마치 내 체온이 예상보다 뜨겁게 느껴진 것처럼.
"이제...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어."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두려움과 결의가 뒤섞여 있었다.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이었다. 아직 남자라는 것. 아직 남편이라는 것. 아직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
거절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잠깐 스쳤다.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게 아니라 시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간절함이 보였다. 이 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시도.
말없이 그를 침실로 이끌었다.
***
침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가운 끈을 풀려다 망설였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불 끌까?"
"...응."
스탠드를 껐다. 달빛만 남았다.
어둠 속에서 그가 내 위로 올라왔다. 젖은 머리카락이 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 그가 내 위에 있을 때는 세상이 눌리는 것 같았다. 그 무게가 좋았다. 안전했다. 지금은 이불이 한 겹 더 덮인 정도였다.
"사랑해, 지수야."
그가 내 입술을 찾았다. 키스는 어색했다. 예전과 각도가 달랐다. 내가 올리고 그가 숙이던 것이 반대가 되어야 했다. 코가 부딪혔다.
"미안."
"괜찮아."
두 번째 키스에서 나는 이상한 감각에 빠졌다. 그의 입술이 부드러웠다. 남편의 입술이었다. 남편의 입술인데, 내가 기억하는 남편의 입술이 아니었다. 거친 표면, 커피 맛, 턱에 긁히던 수염 자국. 그런 것들이 전부 없었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눌렀다. 힘이 없었다. 예전에는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들어올리던 팔이었다. 하지만 손끝에 실린 의지는 같았다.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그의 손이 자기 아래로 향했다. 더듬는 손길. 그리고 멈춤. 긴 정적.
"없어..."
중얼거림.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안 돼..."
내 위에서 굳어버렸다. 떨고 있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어떡하지... 나... 해주고 싶은데... 해줄 수가 없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물이 내 가슴 위로 떨어졌다.
"남편인데... 남편이 아내한테 이것도 못 해주면... 난 뭐야?"
그는 내 위에서 무너지듯 쓰러졌다. 작은 몸이 떨렸다.
나는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아'는 거짓말이었고, '어쩔 수 없어'는 잔인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음이 잦아든 뒤에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
내가 먼저 움직였다. 그를 부드럽게 밀어 옆으로 눕혔다.
"뭐... 뭐 해?"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내가 알려줄게."
"뭐를?"
"당신 몸은 이제 예전하고 같은 방식으로는 안 돼."
그의 옆으로 누우며 얼굴을 마주 보았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싫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여자가 된다는 거잖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다만 지금 당신 몸은 예전과 다르게 작동해. 그걸 무시한다고 바뀌는 건 없어. 아까처럼 더 힘들어질 뿐이야."
말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이 위로인지, 다른 무엇인지. 하지만 아까 무너져 내리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 사람을 다시 그 자리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부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다가갔다.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눈꺼풀. 코끝. 그리고 입술. 내가 먼저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 어색해했다. 무서워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픈 게 아니라 무서운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 안에서 낯선 것이 올라오는 감각. 자기 몸이 자기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반응하는 공포.
나는 멈췄다.
"그만할까?"
"..."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해. 괜찮아."
긴 침묵.
"...아니. 계속해."
작은 목소리였다. 눈을 감고 있었다.
계속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반응이 달라졌다. 내 손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떨렸다. 그냥 떨리는 게 아니었다.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반응했다. 숨이 가빠지고, 손가락이 시트를 움켜쥐었다. 쓰다듬는 정도의 접촉에 이 정도 반응은 지나쳤다. 이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눈이 흐려지고 있었다. 초점이 풀렸다. 아까까지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또렷하던 눈동자가, 안개가 낀 것처럼 멀어졌다. 내 이름을 부르려다 말끝이 흐려졌다. 지... 수... 그 뒤는 말이 아니라 숨이었다.
나를 밀어내려던 손이 어느새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것 같았다.
***
한참 뒤. 그는 내 품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숨소리만 천천히 돌아왔다. 어딘가 먼 곳에서 돌아오는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서서히 잡혔다. 부끄러운 건지, 울고 있는 건지.
"...이런 건 처음이야."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남자일 때랑 완전 달라. 한 곳에서 끝나는 게 아니야. 온몸으로 퍼져. 머리가 하얘지고..."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솔직히... 좋았어. 무섭도록."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근데 그게 무서워. 이 몸이 좋다는 게. 이런 걸 알아버렸다는 게. 이제 어떡해? 다음에도 이런 거 원하게 되면... 난 점점 여자가 되어가는 거 아니야?"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던지는 질문은 나에게도 향하는 것이었으니까. 이 몸을 선택한 것은 내가 했다. 이 몸이 느끼는 것을 이 사람이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감각이 이 사람을 바꿔가고 있다면, 그 변화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고마워."
작은 목소리.
"뭐가?"
"중간에 멈춰줘서. 그만할까 물어봐서."
그 말에 가슴이 아팠다. 이 사람은 지금 누군가가 자기에게 선택권을 줬다는 사실에 고마워하고 있었다. 선택권. 내가 빼앗은 것.
그는 내 품에서 몸을 웅크렸다. 잠이 들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쳐 있었으니까.
***
아침 햇살이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내 팔베개를 하고 잠든 그를 내려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흩어져 있었다. 잠든 얼굴은 평화로웠다. 깨어 있을 때의 두려움과 혼란이 전부 사라진 얼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감촉. 수염 자국이 없는 피부. 손끝이 닿자 잠든 얼굴이 내 손 쪽으로 기울었다. 고양이가 손길에 반응하듯, 무의식적으로. 그가 으음, 하고 잠꼬대를 하며 내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이 사람이 내 품에 안겨 있다는 것. 예전에는 내가 그의 품에 안기는 쪽이었다. 지금은 반대다. 이 사람이 가볍고, 작고, 내 팔 안에 들어온다. 내가 감싸는 쪽이다.
그것이 좋았다.
그 감정을 인식한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지금 좋다고 느끼는 것은 뭐지? 남편이 살아있다는 안도감인가, 아니면 이 달라진 관계에서 오는 무언가인가. 이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이 사람이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나를 안심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한 생각이었다. 남편이 살아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충분해야 했다.
***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이 떴다.
"...몇 시야?"
"아홉 시."
그가 몸을 일으키다 멈칫했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순간. 잠에서 깨어 자기 몸이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 이불 밑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리고 체념하듯 일어나는 것. 매일 같은 순서였다.
"밥 먹자."
"응."
아침을 차리는 동안 그는 식탁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지수야."
"응?"
"나 머리 좀 자르면 안 될까."
젓가락이 멈췄다. 그의 머리카락은 허리 근처까지 내려왔다. 윤기가 흘렀다. 손이 많이 가겠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
"귀찮아서. 감을 때도 오래 걸리고, 말릴 때도 오래 걸리고. 잘 때 깔려서 아프고. 묶어도 무거워."
"얼마나 자르게?"
"다. 짧게."
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떠오른 말은 '아깝다'였다. 두 번째로 떠오른 말도 '아깝다'였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생각했다. 이건 내 머리카락이 아니다.
"알았어. 미용실 예약할까?"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
"네 머리잖아. 당신이 결정해."
"...고마워."
그렇게까지 고마워할 일이 아닌데. 그의 표정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지금 자기 머리카락 길이를 결정하는 것에도 허락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내 허락이.
씁쓸했다.
***
며칠이 지났다.
생활은 매일 작은 벽에 부딪히는 연속이었다.
어느 날 세탁기에 넣어둔 그의 속옷을 보고 눈치챘다.
저녁에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 말을 꺼냈다.
"준우야, 하나만 알려줄게."
"뭐?"
"화장실에서 닦을 때, 앞에서 뒤로 닦아야 해. 반대로 하면 감염 생겨."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개져 있었다.
"...알았어."
그게 전부였다. 더 묻지 않았고, 나도 더 말하지 않았다.
브래지어도 문제였다. 내가 사다 놓은 것을 건네자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등 뒤로 손을 돌려 후크를 채우려 했다. 안 됐다. 세 번을 실패하고 나서 바닥에 내던졌다.
"왜 이런 걸 매일 입어야 해?"
"안 입으면 움직일 때 아파."
"안 아픈데."
"오래 걸으면 아플 거야."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집어 들었다.
"앞에서 채우고 돌리면 편해."
"...그런 방법이 있어?"
앞에서 후크를 채우고 빙글 돌려서 입었다. 서툴렀지만 됐다. 끈을 어깨에 올리고 나서 찡그렸다.
"불편해. 이거 원래 이렇게 느껴져?"
"원래 이렇게"가 무슨 뜻인지 물으려다 말았다.
"익숙해지면 나아져."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사실 처음에는 그랬다. 중학교 때 처음 브래지어를 했을 때의 이물감을 떠올렸다. 다만 그때 나는 열세 살이었고, 주변의 모든 여자아이들이 같은 과정을 겪고 있었다. 이 사람은 서른다섯에, 혼자서, 아무 준비 없이 이것을 해야 했다.
***
옷이 문제였다.
드레스룸에 남아 있는 것은 퇴원 후 내가 급하게 사다 놓은 여성복뿐이었다. 남편의 옷은 없었다. 퇴원 직후 그가 직접 다 버렸다. 서랍을 열고, 옷걸이를 뽑고, 쓰레기봉투에 쑤셔넣었다. 맞지도 않는 옷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때 나는 말렸어야 했을까. 모르겠다. 그의 물건을 그가 버리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있었을까.
그가 드레스룸 앞에 서서 문을 열었다. 잠시 안을 들여다보더니 문을 닫았다. 다시 열었다.
"내가... 다 버렸지."
혼잣말이었다.
"맞다... 내가 다 갖다 버렸지..."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기 손으로 마지막 돌아갈 길을 끊어버렸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실감하는 표정이었다.
***
외출 준비를 하자고 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며칠 뒤, 아침을 먹다가 갑자기 말했다.
"오늘 좀 나가자."
"어디?"
"마트. 아니면 아무 데나. 집에만 있으니까 미칠 것 같아."
놀라웠다. 퇴원 이후 현관문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내가 먼저 제안하려다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말했다.
"좋아. 어디 가고 싶어?"
"옷 좀 사야 할 것 같아. 입을 게 없으니까."
"그래. 같이 가자."
***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내리자 그가 잠시 멈춰 섰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몇 주 만에 처음 보는 외부 세계.
"괜찮아?"
"...응. 좀 어지러워."
팔짱을 끼며 나란히 걸었다. 그는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아직 이 몸의 보폭과 균형에 익숙하지 않았다. 가끔 발이 꼬일 뻔하면서 내 팔을 꽉 잡았다.
1층에 도착하자 백화점의 소음과 조명이 쏟아졌다. 그가 잠깐 눈을 감았다. 밝은 빛이 힘든 것 같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흘끔거리는 눈길들. 그가 내 팔을 더 세게 잡았다.
"사람들이 봐..."
"신경 쓰지 마."
"못 그래..."
"그럼 나만 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선글라스 너머로 불안한 눈이 보였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다.
***
옷 매장에 들어갔다. 점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옷 좀 보려고요."
내가 대답하려는데, 그가 먼저 말했다.
"편한 옷 있어요? 면 소재로. 몸에 안 달라붙는 거."
점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나는 한 발 뒤에서 따라갔다. 그가 스스로 점원에게 말을 건 것이 처음이었다.
그가 고른 것들은 대부분 무채색이었다. 검정, 회색, 네이비. 몸 라인이 드러나지 않는 넉넉한 핏. 여성복이었지만 장식이 없고 단정한 것들.
"이건 어때?"
내가 행거에서 꺼낸 것은 연한 베이지색 니트였다. 부드러워 보여서 집었는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목이 너무 파여."
"그렇게 깊지 않은데."
"싫어."
짧은 거절이었다. 나는 니트를 다시 행거에 걸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약간 놀랐다. 며칠 전만 해도 내가 건네는 것을 그대로 받았던 사람이었다. 무언가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거부할 수 있는 힘.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그는 검은 터틀넥에 와이드 팬츠를 입고 있었다. 장신구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서서 자기 모습을 확인하는 표정에 아까까지의 공포가 없었다. 완전히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견딜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괜찮아?"
"...응. 이건 괜찮아."
"그럼 이걸로 하자."
***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미는데, 그가 먼저 자기 카드를 꺼냈다.
"내가 낼게."
"왜? 내가 사줄게."
"내 옷이잖아."
잠깐 눈이 마주쳤다. 선글라스를 벗은 상태였다. 눈이 빨갛지만 단호했다.
"...그래. 네가 내."
작은 것이었다. 하지만 작은 것이 아니었다.
***
속옷 매장 앞에서 그가 발을 멈췄다.
"이것도 사야 하나."
"응. 맞는 게 있으면 좋겠지."
안으로 들어갔다. 형형색색의 란제리들이 걸려 있었다. 그는 불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거나 편한 걸로 사자. 빨리."
무난한 베이지색과 검정색 세트를 몇 개 집었다. 내가 말리지 않았다. 이 사람이 빨간 레이스를 골라야 할 이유는 없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뭐가?"
"속옷을 사는데 이렇게 긴장한 건 처음이야. 남자일 때는 그냥 아무거나 집었는데."
"지금도 아무거나 집었잖아."
"...그런가."
웃을 뻔했다. 실제로 거의 같은 방식이었다. 아무거나, 빨리, 무난하게. 달라진 것은 매장의 위치뿐이었다.
***
"커피 마실까?"
백화점 1층 카페 앞에서 물었다.
"여기서?"
"응. 좀 쉬자."
주문을 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예전에도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사람이었다. 컵을 감싸 쥔 손가락이 가늘었다. 하지만 컵을 드는 방식은 똑같았다. 손잡이를 잡지 않고 컵 몸통을 감싸 쥐는 버릇.
"밖에 나오니까 어때?"
"...모르겠어. 사람들 시선이 무서워. 근데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을 보았다.
"지수야."
"응?"
"나 걷는 거 좀 이상하지?"
"뭐가?"
"아까 걸을 때 자꾸 발이 꼬였잖아. 보폭이 안 맞아. 옛날 습관대로 걸으면 몸이 따라가지를 못해."
"조금씩 익숙해질 거야."
"익숙해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몸에 적응하면 할수록, 원래 내가 멀어지는 것 같아. 걷는 것도, 앉는 것도, 말하는 것도. 하나하나 바꿔가면 결국 뭐가 남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나에게도 향하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이 사람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것들 — 걷는 법, 옷 고르는 법, 몸을 다루는 법 — 그것이 정말 '돕는 것'인지, 아니면 이 몸에 맞는 사람으로 바꿔가는 것인지.
밖에 나오자고 한 것은 그였다. 옷을 고른 것도 그였다. 속옷을 자기 기준으로 산 것도 그였다. 커피를 시킨 것도 그였다. 그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들. 그것이 나를 안심시켰다. 동시에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가 안심하는 이유가 '그가 적응하고 있어서'라면, 나는 적응을 바라고 있는 것이니까.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가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새로 산 옷이 든 쇼핑백이 뒷좌석에 놓여 있었다.
"지수야."
"응?"
"오늘... 고마워."
"뭐가?"
"억지로 안 시켜서."
그 말의 무게를 곱씹었다. 그가 고마워하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해준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여는데, 휴대폰에 알림이 떠 있었다. 병원에서 온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