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 그녀, 내남편(9)

수연 : 포기

by 빌리박


수연 : 포기


병원은 차갑고 고요했다.


복도의 형광등이 푸르스름한 빛을 흘렸다. 리놀륨 바닥에 반사된 그 빛이 벽과 천장 사이를 떠돌았다. 소독약 냄새가 공기 중에 얇게 깔려 있었다. 어딘가에서 안내 방송이 울렸지만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그냥 웅웅거리는 소리.


진료실 앞, 대기 의자에 지수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의자는 딱딱한 플라스틱이었고 등받이가 허리를 눌렀다. 맞은편 벽에 건강 정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뇌 이식 후 적응 가이드 —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웃고 있는 모델의 얼굴이 어색했다.


지수의 손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지수의 것인지 내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무서워?"


지수가 작게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들을지... 겁나. 혹시 뭔가 잘못됐다고 할까 봐."


지수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손끝이 두피에 닿았다. 따뜻했다.


"걱정 마. 정기 검진일 뿐일 거야."


대기실 맞은편에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엄마가 달래고 있었다. 평범한 풍경이었다. 평범한 병원의 평범한 오후. 그런데 나만 이 장면에서 떠 있는 것 같았다.


"김준우님,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호명. 일어섰다.


김준우. 내 이름인데. 왜 낯설게 들리지.


***


진료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다. 천장의 LED 패널이 자연광을 흉내 냈지만, 그늘이 없는 빛은 오히려 모든 것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진료대 위에 깔린 시트지가 뻣뻣하게 펴져 있었고, 구석에 놓인 인체 모형이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전문의가 홀로그램 차트를 넘기고 있었다. 파란색 수치들이 공중에 떠서 천천히 회전했다. 뇌파 그래프, 호르몬 수치, 시냅스 연결 밀도.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숫자와 곡선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적응이 생각보다 빠르시군요. 외형적인 동기화율이 예상 수치를 훨씬 상회합니다."


지수가 대답했다.


"노력하고 있어요. 본인도, 저도."


노력. 하이힐 신고 걷는 연습. 브래지어 혼자 입는 연습. 목소리를 의식하지 않고 말하는 연습.


그게 노력이었나. 아니면 포기였나.


"좋은 징조입니다. 뇌세포가 새로운 신체를 '자기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자기 것.


"시간이 지나면 뇌 자체가 새로운 호르몬 환경에 맞춰 재구성됩니다. 신경가소성이라고 하죠."


의사가 차트를 넘겼다. 새로운 그래프가 떠올랐다. 두 개의 뇌 단면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3개월 전, 하나는 현재. 색깔이 달랐다. 붉은 영역이 넓어져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3개월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환자분의 뇌는 이미 상당 부분 여성의 뇌에 가깝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펜을 내려놓고 손가락 끝을 맞댔다.


"경험하신 적 있으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적 반응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에어컨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는데도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남성의 뇌는 시각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흥분이 국소적으로 집중되지만, 여성 호르몬 환경에서는 흥분이 전신으로 퍼지고, 감정적 연결이 더 중요해집니다."


전신으로 퍼지는 흥분.


그날 밤이 떠올랐다. 지수의 손길에 온몸이 녹아내리던 밤.


안 돼. 생각하지 마.


"신체가 느끼는 쾌감의 패턴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처음엔 혼란스러우실 수 있습니다."


혼란.


혼란이라고.


그건 혼란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그리고... 황홀함이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지수의 얼굴도 붉어져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무릎 위의 손이 주먹을 쥐고 있었다.


"뇌는 놀라울 정도로 적응력이 좋습니다."


의사는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이.


"신경가소성이라고 하죠. 시간이 지나면 뇌 자체가 새로운 호르몬 환경에 맞춰 재구성됩니다. 생각하는 방식, 느끼는 방식, 반응하는 방식 모두요."


뇌가 재구성된다고.


내 뇌가.


김준우의 뇌가.


그렇다면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누구지.


홀로그램 차트가 꺼졌다. 진료실이 한 톤 어두워졌다.


***


의사가 깍지를 꼈다. 책상 위의 명패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뇌신경외과 전문의 박상현'.


"오늘 부른 건 단순히 검진 때문만은 아닙니다."


잠시 멈춤. 복도에서 카트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M-시리즈, 남성형 생체 바디의 수급이 원활해졌습니다. 배양 라인이 증설되면서 대기 순번이 당겨졌거든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원하신다면 뇌 이식 수술 스케줄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다시 남자가 될 수 있다고요?"


목소리가 떨렸다.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이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가능합니다. 다만 비용이 100억 원 정도, 수술 성공 확률은 60퍼센트입니다.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선택적 이식이니까요."


100억. 60퍼센트.


의사의 입이 계속 움직였다. 단어들이 진료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 떠다녔다.


"두 번의 뇌 이식은 신경계에 과부하를 줍니다. 최악의 경우 뇌사나 영구적 인지 장애가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자분의 뇌는 이미 F-72의 신경망에 맞춰 재배선된 상태입니다. 강제로 남성형 바디로 옮길 경우, 시냅스 파열이나 영구적 신경 손상이 올 수 있고요."


"무엇보다 — '생체 바디 서브스크립션 법령'에 따라 바디의 교체 및 처분에 관한 최종 결정권은 비용을 지불하는 보호자에게 있습니다."


보호자.


지수.


시선이 지수에게로 갔다.


지수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형광등 빛 아래서 지수의 얼굴이 창백했다.


"선생님."


지수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그 수술은... 일단 보류할게요."


"지금 당장 결정하기엔 너무 큰일이라서요. 리스크도 크고, 비용 문제도 있고...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나중에.


"알겠습니다. 언제든 생각 정리되시면 연락 주십시오."


내 손이 지수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료실 밖으로 나오자 복도의 형광등이 다시 눈을 찔렀다.


***


병원 문을 나서 주차장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바깥 공기가 달랐다. 3월의 바람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온도로 얼굴을 스쳤다. 병원 앞 가로수에 새싹이 돋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커피 냄새가 났다.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복도를 걸었다. 지수 옆을. 항상 팔짱을 끼거나 옷자락을 쥐던 손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우리 사이에 반 보폭쯤의 간격이 생겼다.


주차장은 지하에 있었다. 콘크리트 천장이 낮았고 배기가스와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우리 차는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콘크리트 기둥만 보였다.


어깨가 떨렸다. 울음이 나오려 했다.


"준우씨."


대답하지 않았다.


"화났어...?"


"100억은 너무 큰돈이잖아. 그리고 위험하기도 하고..."


"만약 수술하다가 자기가 잘못되면, 난 못 살아. 진짜야."


맞는 말이었다. 전부 맞았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지수를 봤다.


지수의 얼굴이 굳었다. 입술이 일직선이었다. 눈가에 그림자가 졌다.


다시 창밖을 봤다.


지수가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울리고 대시보드에 불이 들어왔다. 환기구에서 찬 바람이 나왔다가 멈췄다. 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핸들을 쥔 손에 땀이 차 있는 게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주차장의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어딘가에서 차문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수가 기어를 넣었다.


***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옆에서 지수의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느렸다. 잠든 것 같았다.


커튼 사이로 가로등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천장에 긴 줄무늬를 만들었다. 에어컨이 꺼진 방 안에서 시계 소리만 째깍거렸다. 이불 속에서 실크 잠옷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이 감촉에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의사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여성의 뇌.


내 뇌가 변하고 있다고.


재수술. 100억. 60퍼센트.


분노가 치밀었다.


내 몸인데. 내 인생인데.


하지만 동시에.


안도.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안도했다.


어둠 속에서 내 손을 바라보았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 연한 핑크색 매니큐어. 가로등 빛에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숨이 막혔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불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발바닥이 차가운 마루에 닿았다. 화장실로 갔다. 문을 닫고 세면대 물을 틀었다.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이 세면대를 때리는 소리가 좁은 욕실에 울렸다. 타일 벽에 반사되어 두 배로 커진 소리. 거울 속의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흘러내려 볼에 붙어 있었다.


세면대를 붙잡았다. 도자기의 차가운 감촉.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물소리만 계속되었다. 세면대 배수구로 물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 수도관이 벽 안에서 우는 소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물을 멈추고 얼굴을 닦았다. 수건에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지수가 고른 향. 침대로 돌아왔다.


지수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불 위로 보이는 어깨의 윤곽이 고요했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나도 몰랐다.


***


다음 날 오후.


일요일이었다. 햇살이 거실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왔다. 먼지가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어디선가 이웃집 아이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지수는 소파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고, 나는 옆에 웅크리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커피 향이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지수가 내려준 아메리카노. 내 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실크 슬립 원피스 차림. 집에서 이런 옷을 입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실크가 피부에 닿았다. 서늘하고 매끄러웠다. 소파 팔걸이에 기대었을 때 어깨끈이 미끄러졌다. 무심코 올렸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잠깐 손이 멈췄다.


싫어해야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지수가 인터폰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굳었다. 노트북 위에 놓인 손이 멈춘 채로.


"누군데?"


"......시부모님이야."


벌떡 일어났다.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펼쳐진 채로 엎어졌다.


인터폰 화면을 보았다. 작은 액정 속의 화면이 흔들렸다.


엄마와 아빠였다.


아빠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엄마는 반찬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비닐봉지 안에 김치통의 붉은 색이 비쳤다.


"안방에 들어가 있어."


지수가 내 어깨를 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오지 마. 절대 나오면 안 돼. 문 잠그고 있어."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방 안이 조용했다. 창밖에서 참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침대 위에 아까 입고 있던 카디건이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가슴 소리를 들었다. 터질 것 같았다.


현관이 열렸다. 실내화 벗는 소리. 비닐봉지 바스락거리는 소리.


"지수야! 어쩜 연락 한 통 없니? 우리 준우는, 우리 준우 어디 있니?"


엄마 목소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리는 엄마 목소리.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문을 따라 천천히 주저앉았다. 마루 바닥이 차가웠다.


엄마가 울고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 죄송해요. 경황이 없어서..."


"언제까지 숨길 셈이냐? 뇌사 상태였다가 깨어났으면 부모한테 제일 먼저 알렸어야지!"


아버지의 고함. 거실 벽에 부딪혀 울렸다.


작년 설날이 떠올랐다. 아버지 옆에서 제사상을 차리던 나. "장남이 이래야지." 어깨를 두드리며 웃던 얼굴. 소주 한 잔 따라주던 투박한 손.


그 아들이.


지금 레이스 달린 슬립 원피스를 입고 방에 숨어 있다.


"우리 준우... 우리 아들..."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거실과 안방 사이의 나무 문. 이 얇은 문 하나가 두 세계를 갈라놓고 있었다.


손이 문고리로 향했다.


머리가 명령했다. 열지 마. 숨어 있어.


손가락이 문고리를 잡았다. 스테인리스의 차가운 감촉. 돌렸다.


문이 열렸다.


"......엄마."


거실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오후의 햇살이 거실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속에 엄마가 서 있었다. 아버지가 서 있었다. 지수가 서 있었다.


엄마의 손에서 반찬 보따리가 떨어졌다. 플라스틱 통이 바닥에 부딪혀 굴러갔다. 된장찌개용 재료가 비닐봉지 안에서 쏟아졌다.


"이게... 이게 무슨..."


엄마의 눈이 내 얼굴에서 시작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머리카락, 어깨, 가슴, 허리, 맨발의 발끝까지.


"누구니? 내 아들 준우는 어디 가고..."


"엄마, 나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이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준우예요."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소파 팔걸이를 짚었지만 잡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평생 강인했던 아버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지수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설명했다. 사고. 뇌사. 이식. 여자 바디밖에 없었다는 것.


나는 지수의 등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지수의 등이 넓지 않았다. 다 가려지지 않았다.


엄마가 다가왔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실내화가 마루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준우야... 내 아들 김준우 맞지?"


엄마의 손은 거칠고 투박했다. 농사일과 김장으로 단련된 굳은살과 갈라진 주름. 어릴 때 열이 나면 이마를 짚어주던 손. 대학 합격했을 때 볼을 어루만지던 손. 그 손이 지금 가늘고 하얀 내 손을 감싸고 있었다.


"엄마..."


그 손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


엄마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손이 멈칫했다. 짧게 깎아주던 아들의 머리카락과는 다른 감촉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무서웠니..."


엄마가 나를 안았다.


예전엔 내가 엄마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는데. 지금은 엄마 어깨에 얼굴이 묻혔다. 엄마에게서 고춧가루와 비누 냄새가 났다. 집 냄새. 오래된 냄새.


엄마의 몸이 굳었다.


잠깐. 짧게. 하지만 느꼈다. 안았을 때 닿은 것. 엄마도 느꼈을 것이다.


엄마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거실에 침묵이 내렸다.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수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병원에서 상담을 받았습니다. 남성형 바디로 재이식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정말이냐?"


아버지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바닥에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다시... 우리 준우로 돌아올 수 있단 말이냐?"


우리 준우.


아버지에게 지금의 나는 '준우'가 아니었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비용이 100억, 성공률 60퍼센트라고 합니다."


"100억... 그게 무슨 길바닥 돈인 줄 아니?"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주먹이 무릎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준우야, 우리 집 팔아봐야 3억이나 되려나... 아빠가 죽었다 깨어나도 마련할 수 있는 돈이 아니야."


엄마가 지수를 봤다.


"지수야... 넌 없니? 네 친정 말이다. 네 아버지가 그렇게 큰 회사 이사님이셨잖아."


지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햇살이 비추고 있었지만 그늘이 진 것처럼 보였다.


"어머님...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상황이 바뀌었어요. 회사에서 아빠에게 소송을 걸었어요. 상속받은 모든 것이 가압류 상태예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통장 하나 제 마음대로 못 써요. 저도... 빈껍데기일 뿐이에요."


왜 말 안 했어. 그 많은 밤을 함께 보내면서.


"세상에... 세상에..."


엄마가 주저앉았다. 바닥에 쏟아진 된장찌개 재료 옆에.


엄마가 다시 나를 안았다. 하지만 아까와 달랐다. 손길에 힘이 없었다. 등을 쓸어내리다가 멈췄다.


"그래도... 이런 모습으로라도 살아줘서 고맙다."


"죽는 것보단 낫지 않으냐..."


아버지가 일어났다. 무릎을 짚고 천천히. 관절이 소리를 냈다.


"몸조리 잘 해라. 우리는... 간다."


엄마도 눈물을 훔치며 따라 일어났다. 바닥의 반찬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쏟아진 재료를 주워 담았다. 손이 떨려서 비닐봉지를 두 번 놓쳤다.


"엄마..."


엄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현관에서 신발 신는 소리. 발을 끄는 소리.


현관문이 닫혔다. 잠금장치가 딸깍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고요.


***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닫힌 현관문을 바라봤다. 문 아래 틈으로 복도의 형광등 빛이 새어 들어왔다.


엄마가 흘리고 간 양파 하나가 식탁 아래까지 굴러가 있었다.


"준우야..."


지수가 다가왔다. 어깨를 감싸려 했다.


"건드리지 마."


손이 지수의 손을 뿌리쳤다.


"혼자 있고 싶어."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잠갔다. 등을 문에 기대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침대에 쓰러져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의 작은 얼룩이 보였다. 입주했을 때부터 있던 얼룩. 처음엔 곰팡이인 줄 알았는데 그냥 페인트 자국이었다. 그걸 올려다보며 몇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어젯밤의 감정이 떠올랐다.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 안도.


엄마는 나를 안다가 멈췄다.


아버지는 끝내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


밤이 깊었다.


아파트 건물 전체가 조용했다. 위층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한 번 울리고 그쳤다. 창밖에서 가끔 차가 지나갔다. 헤드라이트 빛이 천장을 스치고 사라졌다.


문 너머로 노크 소리.


"준우야... 밥 먹어야지. 문 앞에 놔둘게."


그릇 놓는 소리. 숟가락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 발걸음이 멀어졌다.


미안해, 지수야.


하지만 지금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침대에 웅크린 채 창밖을 바라봤다.


달빛이 스며들었다. 커튼을 타고 흘러내린 빛이 이불 위에 하얀 사각형을 만들었다. 밖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이 도시의 밤은 완전히 고요해지는 법이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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