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사막을 달리는 간호사’
인생을 살다 보면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만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해에 내가 치른 수능 또한 그러했다. 수능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인터넷에 올라온 시험지와 답안지로 가채점을 하기 위해서였다. 시험의 긴장감과 떨림은 시험장 밖을 나와 내 방 안까지 이어졌다. 가장 먼저 1교시였던 언어영역을 가채점했다. 문제 하나하나를 정답과 맞춰갈 때마다 맞혔을 때의 희열과 틀렸을 때의 슬픔이 끊임없이 교차했다. 채점을 하면 할수록 내 답안지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답지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터넷에 올라온 답지가 잘못된 줄만 알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답지가 아닌 내 답안지였다. 언어영역의 점수를 확인한 순간 ‘나는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인 게 분명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외국어 영역을 채점했는데 성적을 확인해 보니 확실히 외국인은 더 아니었다. 갑자기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채점 결과는 너무나 절망스러웠고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머지 과목에서는 그래도 평소와 비슷한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시간들에 비해 내 수능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지금의 수능 성적으로는 목표했던 대학은 물론 간호학과에 지원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적에 맞춰 다른 학과로 진로를 바꿔 지원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성적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다. 몇 날 며칠을 컴퓨터 앞에 앉아 전국의 간호학과가 있는 대학교 홈페이지를 뒤적거렸다. 나에게 가장 유리한 입시 전형을 가진 대학교를 찾기 위해서였다.
정시로 대학을 지원하게 되면 가, 나, 다 총 3군데의 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성적에 맞춰 서로 다른 학교와 학과를 적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3군데 모두 간호학과에 지원했다. 간호학과가가 아니면 딱히 가고 싶은 학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원한 곳들 중 어느 곳 하나 내 수능 성적으로는 합격 안정권인 곳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추가 합격이라는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는 추가 합격자 대기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기나긴 기다림이 시작됐다.
하지만 간호학과는 인기학과였기에 합격을 취소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기번호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내 앞에는 아직도 추가 합격을 기다리는 수십 명의 대기자들이 있었다. 어쩌면 이 기다림은 그저 희망고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기나긴 기다림은 추가 합격 발표의 마지막 날까지 이어졌다. 하루하루를 간절하게 기다리며 혹여나 추가 합격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항상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다녔다. 하지만 그러한 간절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추가 합격 발표 마감일까지 내 휴대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결국 내 차례는 오지 않았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눈앞에서 하늘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간호학과를 가기 위해 노력해 왔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날 늦은 저녁, 착잡한 마음을 위로해달라는 요량으로 집 근처로 친구를 불러냈다. 친구를 만나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친구는 한껏 풀이 죽어 있는 나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그때 처음 보는 낯선 번호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지만 이미 공지했던 합격자 발표 마감시한을 훌쩍 넘긴 늦은 저녁이었기에 추가 합격 전화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김보준 학생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혹시 다른 대학교에 등록하셨나요? 급하게 한 분이 등록을 취소하셔서....”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은 대학입시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당시의 나는 너무나도 간절했기에 그 상황은 어떤 반전 드라마보다 더 짜릿한 전개처럼 느껴졌다.
“아직 등록한 곳이 없으시면 등록하시겠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 최대한 차분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괜히 흥분된 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등록하도록 할 게요.”
그 당시 나는 대학생활의 첫 시작이자 꽃이라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런데 혹시 신입생 OT는 언제죠?”
수화기 반대편으로 잠깐 당황한 듯 짧은 정적이 이어진 후 한마디의 대답이 들려왔다.
“간호학과 OT는 오늘 출발했어요....”
“아, 그렇군요....”
전화를 끊자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친구가 이미 내 합격 소식을 눈치 채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친구와 함께 합격의 기쁨을 나눴다. 내 합격을 축하해 주기라도 하듯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의 겨울밤은 온몸이 시릴 만큼 차가웠지만 나에게는 그 어느 날보다 따스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조금 늦게 돌아가긴 했지만 나는 그토록 원하던 간호학과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