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선호사상을 굳이 감추지 않고 살던 마을, 박 씨들이 모여사는, 씨족집단인 마을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딸로 태어났다.
첫째는 장녀라서 둘째는 장남이라서 막내는 눈만 봐도 눈물이 난다는 사랑스러운 아들이라서 셋째 딸인 나는 손가락에서 제일 마지막 순서로 접히게 되었다.
유년 시절 우리 아빠는 매우 엄하셨다.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알려주셨고 그와 동시에 별안간 불호령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언니 오빠가 공부하지 않는다며 풀지 않은 문제집을 내 눈앞에서 태웠다. 어린 나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일들로 언니 오빠가 혼나는 상황을 잘 보았다가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차츰차츰 눈치 빠른 셋째가 되어버렸다.
밤 9시가 되면 아빠는 모든 불을 소등하셨다. 내가 잠이 오지 않은 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나는 말똥말똥한 눈을 뜬 채 꼼지락 거리다 잠이 들었다. 다시 불을 켜면 안 되는지? TV를 계속 보면 안 되는지? 묻지 못했다. 내 개인의 생각을 말할 수 도 있었겠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했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선을 지키며 사는 것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여전히 매우 수동적 사람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한다. 엄했던 우리 아빠의 영향을 받은 나는 내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한 엄마가 됐다. 불행하게도 남편 역시 엄한 시부모님 아래서 자랐기에 우리 아이들은 꽤나 엄한 부모를 갖게 된 셈이다.
아빠가 했던 지시적인 행동들을 나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내겐 아빠의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뭐든지 해보라고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위험해서 제약하고, 저런 행동은 불안해서 중단시킨다. 어른의 눈으로 판단하고 아이의 주도성을 멈추게 만드는 나를 자주 마주한다. 그런 영향을 받은 아이들이 나처럼 소극적인 삶을 살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무한히 허용하고 배려하는 친구들을 볼 때면 참 부럽다. 그 모습 자체를 동경해 왔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못한 결핍이 작용한 것 같다.
허용적이고 무조건적 지지를 해주는 엄마, 그런 엄마가 왜 나는 되지 못했을까? 자책하고 반성한다. 그러면서도 쉽게 그런 엄마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내가 언젠가부터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아이가 교회를 가겠다고 한다.
나는 교회를 개인적인 사정으로 아주 싫어한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가보라고 했다.
아이가 밤 11시까지 놀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또 그러라고 했다.
아이가 파자마 파티를 한다고 한다.
다 큰 딸이 남의 집에서 잠을 잔다고? 걱정이 됐지만 그러라고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됐다. 우리 아빠가 이래서 못하게 했었구나. 걱정이 많았었구나. 이해하게 됐다.
몇 주 전부터 딸아이의 표정과 느낌이 심상치가 않다. 외모도 부쩍 신경 쓰는 것 같고 얼굴도 상기되어있다.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나?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전 딸아이가 몸을 비비 꼬며 말했다.
엄마 누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 친구 나쁜 친구는 아니에요. 공부도 잘하고 키도 커요. 그 친구를 아는 제 친구도 괜찮은 아이래요. 근데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면 어쩌죠?
너를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교실에 찾아와서 먹을 걸 주고 그냥 가요. 그리고 저도 느낌이 있죠~
역시 엄마는 엄마구나 싶었다. 못난 엄마이긴 해도 예감이 틀리지 않은 걸 보니 엄마가 맞다. 자기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딸, 그런 딸이 감추지 못한 설렘을 엄마인 내가 알아차렸다. 다행이다.
한 번 만나보라고 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다니. 만나 보라고 내가 허용을 하다니, 과거의 나는 학생에게 이성교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규정되어 있다. 우리 아빠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는 우리 아빠랑 다른 엄마가 됐다. 이제라도 우리 아이들이 생각도 선택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둘 참이다. 아이들이 나를 닮아 금지하는 것만 많은 부모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해준 딸에게 참 고맙다.
남자친구 후보 1은 머리가 많이 크다며 계속 웃었다. 카톡으로 대화하면 계속 자기 할 말만 한다며 구시렁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