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은 다 그 정도는 힘들어. 다른 핑계는 없어.
너 스스로 버티지 못한 거고, 주변 사람들을 납득 시키는 것도 너의 몫이지.”
퇴사한 뒤, 아빠를 만났을 때 들은 말이다. 나는 회사의 상황이 이랬고, 리더가 이런 사람이었고, 나도 정말 애써봤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때 아빠는 단 한 마디로 내 긴 이야기를 정리했다.
“핑계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이야기해봐.”
돌아보면, 아빠는 언제나 그랬다.
수능을 망쳤을 때도
“점수는 이미 나온 거고, 이 안에서 너가 갈 수 있는 대학과 과를 가져와라.”
취업을 준비할 때도
“졸업하면 앞으로의 계획을 세 가지 안으로 정리해와라.”
냉정했지만, 그 시간 동안 아빠는 언제나 내 곁에서 방어선을 만들어줬다.
내가 수능을 보던 해는 등급제가 처음 시작된 해였다. 아빠는 등급제를 연구해 내가 지원할 수 있는 학교와 학과를 직접 리스트업해오셨다. 취업을 준비할 땐,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언론사 기자, 방송국 피디들을 소개해주셨고, 이력서를 보여드리며 조언을 들을 기회를 만들어주셨다.
이번에 아빠는 달랐다. 그리고 가장 무거운 말을 덧붙이셨다.
“퇴사는 네가 결정한 일이니, 너 스스로 그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해.”
증명.
대표님도 퇴사할 때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다.
“실수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실패하면 안 돼요.
이게 실수인지 실패인지는 이제 파트장님의 실행에 달려 있어요.”
회사에서 나를 가장 괴롭히는 단어는 ‘자기 증명’이었다.
‘나는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걸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고, 퇴사를 하면 그 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퇴사는 더 큰 차원의 자기 증명을 요구했다.
회사라는 조직은 일종의 방어선이었다. 아빠가 내게 쳐주던 방어선처럼.
내가 기획을 하면, 말 없이 손과 발이 되어 멋진 작업물로 구현해주는 팀원들이 있었고, 혼자 감당하기엔 벅찬 일들도 ‘같이 해보자’는 말 한마디에 견딜 만해졌고, 내가 부족한 부분은 누군가의 재능이 자연스럽게 메워줬다.
그 안에서 나는 그 방어선을 딛고, 자기 증명을 해왔다. 이제는 그 방어선도 없다. 회사도, 아빠도, 더 이상 나 대신 방어선을 세워줄 수 없다. 퇴사의 무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 있었나.
사람들은 흔히들 말했다.
“회사 안은 온실이고, 회사 밖은 정글이다.”
그럼에도 나는 회사 밖이 천국일 것 같았다. 복잡한 관계, 끝없는 업무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막상 박차고 나와보니, 이제는 증명의 방어선 마져도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걸 실감한다.
이제 내가 나의 방어선을 세우고, 나에게 증명해야 한다.
다행인 건, 더 이상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 '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증명하면 된다. 회사도, 아빠도 아닌 바로 나에게.
나는 나를 살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며 걷고 있다. 두려움이 없진 않지만, 방어선 없이도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내가 증명해 보일 차례다.
editor 큐
10년간 회사를 위해 글을 쓰다, 다음 10년은 나와 가족을 위한 글을 쓰기로 했다.
글로 먹고사는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도전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