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의 주인공 - 천재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
[조지아의 보석, 시그나기 여행 4] 국립 시그나기 박물관
거장 니코 피로스마니 – 영양실조로 사망, 무덤 위치도 몰라
국립 시그나기 박물관
시그나기에 왔다면 시그나기 민속 박물관은 꼭 둘러보아야 한다. 박물관 2층 전시관에서 니코 피로스마니의 그림들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는 조지아 예술가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베일에 싸인 화가’이다.
니코 피로스마니 - 니콜라이 피로스마니쉬빌리는1862년 시그나기 인근 미르자니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여덟살 때 부모와 형까지 잃고 고아가 되었으며, 10살 무렵 트빌리시의 부유한 상인의 양자로 들어갔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 그와 관련된 얘기들은 너무 다른 버전이 많아 언급하기가 꺼려진다.
피로스마니 연구가들은 그가 최소한 천 점이상(혹자는 2천점 이상이라고 함)의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세상에 남아 있는 그림은 300 점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중 16여 점이 이 곳 시그나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로 160여 점은 조지아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조지아 내셔날 갤러리, 바투미 피로스마니 박물관, 피로스마니의 고향인 미르자니 소재 니코 피로스마니 박물관과 러시아 트레치야코프스키 갤러리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문을 연 시그나기 박물관은 리노베이션을 거쳐 2007년도에 현대적인 운영체계를 갖춘 뮤지엄으로 재탄생하였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조지아의 5대 국립박물관에 들 정도로 내실있는 박물관이다. 2009년에는 조지아 최초로 ‘피카소 전’이 열리기도 했다.
5라리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1층은 유물전시관으로, 카헤티 지역에서 발굴된 석기시대 ~기원전 1세기 때의 고고학적 유물들과 전통의상, 악기, 무기같은 민속학적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 유물들에 대충 눈길을 주고 피로스마니 상설전이 열리고 있는 2층 갤러리로 바로 올라갔다. 마침 ‘일본인형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니코 피로스마니 전시관
전시장에는 단체관람팀 한 팀을 제외하고는 나 밖에 없었다. 단체팀은 ‘타마라 여왕’초상을 둘러싸고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홀 중앙에는 흑백 대조를 이룬 의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설마 저 의자들 혹시 작품인가…’ 할 정도로 멋스러웠다.
한쪽 벽에는 ‘타마라 여왕’ 초상화를 비롯해 남성들의 초상화 3점이 걸려 있었다. 맞은편에는 당나귀 동상의 원작인 ‘당나귀를 탄 의사’를 비롯해 ‘잔치’, ‘수확’, ‘템버린을 든 조지아 여인’, ‘맥주잔을 든 여인’ 이 걸려 있었다.
피로스마니의 그림에는 상점의 간판이나 초상화가 많다. 대부분 상점간판 주문이나 초상화의뢰를 받고 그린 것들이다. ‘타마라 여왕’ 역시 ‘주문 제작’이다. 화가는 특별히 ‘타마라 여왕’을 좋아해서 여러 장의 다른 ‘타마라 여왕’을 그렸다고 한다. 12세기 조지아의 위대한 시인 쇼타루스타벨리 초상화도 있다.
‘맥주잔을 든 여인’과 ‘템버린을 든 조지아 여인’은 그가 그린 몇 안되는 여자 초상화이다. ‘맥주잔을 든 여인’은 창녀일 가능성이 높다.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창녀가 무언가를 응시하며 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피로스마니의 초상화에는 가게 점원, 관리인, 행상인들, 철도노동자, 농부, 술집여자, 짐꾼들, 창녀, 사채업자, 실업자, 부상당한 병사, 밀수업자 등 수많은 인물군상이 등장한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반 변혁과 전환의 시대에 직면해 있던 조지아 사회와 민중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배경이 검정색이나 빨간색 등 단일한 색으로 처리되는데, 마치 오늘날 사진관에서 빨간색이나 검정색 배경판을 놓고 찍은 증명사진을 연상시킨다.
제한된 색채와 색채의 다양성,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표현, 과감한 배경의 생략 등 이전까지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피로스마니의 화풍은 후에 원초주의(원시주의)의 화풍과도 맥이 닿는다. 피카소는 피로스마니의 초상화를 그려 헌정한다.
당대에 환영받지 못했던 화가
피로스마니는 당대 조지아 미술계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두고 ‘학교나 먼저 다니고 오라’ 느니 ‘수준 낮은 간판장이 그림’이라며 멸시하고 조롱하였다.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나 미술학원생이 그린 그림’으로 치부되었다.
1910년대 초반 모스크바에서 전시회도 하고, 작품도 팔렸지만 그의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피로스마니는 주로 선술집이나 지인의 집, 작품 의뢰인의 집에 머물렀는데 어디서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림이 완성되어 돈이 생기면 어디론가 떠났다가 돈이 떨어지면 새로운 작품의뢰를 받기 위해 트빌리시로 돌아오곤했다. 트빌리시로 돌아오면 언제나 일거리가 있었다. 많은 돈을 아니어도 굶주리지는 않았다.
그가 죽던 해는 예전상황과는 달랐다. 평소보다 오랫동안 트빌리시를 떠나 있던 피로스마니는 1918년 2월 혹은 3월경에 트빌리시로 돌아왔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혁명의 여파로 국제 정세뿐만 아니라 조지아 국내 상황도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수도 트빌리시도 마찬가지였다.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 전쟁터에서 돌아온 부상자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상점 간판을 새로 그리고 초상화를 그릴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림을 주문하지 않았다.
일감이 없는 피로스나미는 점점 궁핍해졌다. 빵 대신 술을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 돈이 없어 빵값 대신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빵값으로 그려준 황소 그림은 현재 경매시장에서 수 십억을 호가한다니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겨우 마련한 어둡고 좁은 지하실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보드카만이 유일한 그의 친구였다.
그날도 피로스마니는 하루종일 어딘가를 헤매고 돌아다니다 술에 취한 채 자신의 지하방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곤 깨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에는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졌다. 사인은 영양실조와 간기능부전.
연고자가 없던 그는 트빌리시 성니노 공동묘지의 ‘신원불명자’구역에 장례의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이름을 모르니 매장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사망 당시의 정확한 나이도 알 수 없다. 쉰 다섯 살 혹은 쉰 여섯살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후에 연구가들이 그의 무덤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그의 마지막은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음산한 겨울날 몇 명의 인부가 수레에 싣고 온 시체를 구덩이에 던져넣고 횟가루가 섞인 흙으로 구덩이를 덮는 장면.
당대 기득권으로 똘똘 뭉친 미술계에서 조롱과 멸시에 시달리던 한 천재화가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타협하고 싶지 않은 생각을 피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항간에 그는 불행한 삶을 살다간 비운의 화가로 회자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화가는 스스로 비루한 일상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했던 것 같다.
화가는 조지아의 산과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풀냄새 가득한 초원위에서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또 선술집에서, 시장에서, 역에서, 항구에서, 포도밭에서 만난 일반 서민들과의 만남에서 어떤 동질감이나 마음의 평안을 얻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그림이 조지아 민중의 삶과 영혼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수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피로스마니의 삶을 재구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살아 있을 때 그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사망기록이나 매장기록도 없다. 그의 무덤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피로스마니의 연구가들도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친척들의 증언이나 회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에 관한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이 독버섯 처럼 퍼져 나간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