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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Sep 11. 2015

엄마의 사랑이야기

팜파탈 엄마

엄마에게는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 하나 있다.

남편은 물론이고 동생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엄마와 나만 공유했던 비밀이었는데 이제는 나만 알게 되었다.

엄마는 치매가 오면서 추억을 하나 둘 잃어버리셨는데, 그분에 대한 기억을 제일 먼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젊은 시절의 엄마는 아버지의 바람기 때문에 어지간히 속을 썩으셨다.

잘생기고 매력적인 아버지에게 항상 젊은 여자들이 따랐기 때문이다.
아이가 주렁주렁 딸리고 살림에 찌든 엄마로서는 그녀들과 외모로나 나이로나 대적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50살에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중풍환자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엄마의 갖은 구박을 있는 대로 다 받고 돌아가셨으니 바람 피운 대가는 어지간히 치른 셈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버지에 대한 애증은 오랫동안 엄마를 괴롭혀서 맏딸인 내가 그 원망을 다 들어 드렸다.

엄마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전화로 들어주다 보니 나도 슬슬 지쳐서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나한테 전화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무엇보다도 통화 내용에서 아버지가 사라졌다.

이제 엄마도 환갑의 나이가 지나면서 효소가 발효되듯 숙성해서 노골노골 세상 모든 일에 관대해졌기 때문인 가보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에게 동남아 여행 티켓이 생기면서 엄마의 사랑이 드러났다.

어느 카드사의 카드 사용에 대한 수기 공모에서 내가 대상에 당선되면서 동남아 여행권 2장을 부상으로 받은 것이다.

남편과  함께하려던 여행은, 남편이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고 엄마에게 이모랑 다녀오시라고 티켓을 드렸다.

엄마가 이모가 아닌 친구와 다녀올 거라고 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여행사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와 함께 가시는 분의 이름만 알고 있으니 나머지 인적사항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행하는 친구분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고 한다.

나는 뭔가 착오가 있겠지 하면서 엄마에게 심드렁하게  알려 드렸는데,

엄마는 마치 바람 피다 들킨 18살 처녀마냥 수줍어하면서 고백하셨다. 요즘 사귀는 아저씨라고.

뭔가에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을 받았지만, 곧 맏딸답게 엄마의 사랑을 응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하기로 하고 재미있어까지 하는 내가 친구 같았는지

엄마는 그동안의 러브스토리를 술술 털어놓으셨다.

마치 첫사랑에 푹 빠진 처녀처럼 엄마는 재잘대며 그 아저씨가 서울대 나온 분이라는 것까지 슬쩍 자랑했다.

물론 대학 동창회에 함께 다녀왔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은근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깔려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버지 직장동료 중에 서울대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늘 그 사람에게만은 기가 죽더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요새 말로 뇌섹남을 좋아했나 보다. 엄마는 초등학교를 겨우 나왔지만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다. 물론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봤을 때 지극히 정상적인 커플이긴 했다.


아무튼 나에게 들키고 난 후 엄마는 드러내 놓고 연애를 즐기셨다.  물론 나만 아는 비밀이긴 했지만...

당시 엄마는 직장에 다니는 동생집 아이들 육아를 도맡고 있었다

아이들도  제 앞가림은 할 정도가 된 초등생이 되었기에 육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시기이다.

주말에는 얄짤없이 아이들 팽개치고 집으로 가신다고 동생이 내게  하소연했는데도 비밀을 굳건히 지켜 드렸다.


이제 엄마의 사랑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아저씨와는 산에서 만났다.

여러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다녔던 분들 중 한 명이었고,

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그분은 어느 잡지의 여행작가로 활동하고 있단다.

남들이 몰라서 가지 못하는 길도 능숙하게 안내하는 등 매너도 좋은 그분은 몇 년 전에 상처한 솔로라서  동네 과부 할머니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요새는 60살이면 청춘이라지만 그때는 꼬박꼬박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어느 날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퉁박을 맞았다.

- 얘~  할아버지가 뭐니?  아저씨한테.

하고는 깔깔 웃는데 영낙없는 사춘기 소녀다.

엄마가 그렇게도 명랑하고 교태스러웠는지 내겐 영 낯설었지만 어쩐지 지난날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만 같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튼 인기 짱인 이 아저씨를 엄마가 차지한 사연을 들어보니 역시 영계가 먹혀들었다.

아저씨는 70살에 가까운 분으로 역시 나이 70에 가까운 이대 나온 아주머니와 비밀연애 중이었는데 60대 초반 영계인 엄마가 아저씨를 가로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다 같은 산악회 팀이었던 친구들은 모두 흩어지고 두 연인만 남았다.

여기까지 얘기하는 엄마 얼굴을 보니 사랑을 쟁취한 자신감에 환하게 빛났다.

남의 남자를 빼앗은 희열에  즐거워하다니,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기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적이 있는 엄마가 맞나 싶었지만 난 엄마 딸이니까 함께 즐거워했다.


엄마와 아저씨의 사랑은 오빠가 암에 걸려 투병하면서 끝이 났다.

엄마는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오빠의 병간호에 집착했다.

뭐가 암에 좋다 하면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를 기어 가서라도 구해와야 할 정도로   동분서주하니 아저씨도 덩달아 함께 쫓아 다녔다.

어느 날, 엄마가 아저씨에게 이별을 고했다.

자식이 생사를 넘나드는데 아무래도 이부종사가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몹쓸 병에 걸린 것도 그동안 나쁜 짓 한 것에 대한 벌인 것 같다고.

아저씨가 아무리 회유를 해도 엄마의 마음은 이미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의지만으로 가득 차 있어 들어설 틈이 없었다.

결국 오빠도 세상을 떠나고 아저씨도 엄마를 떠났다.

나중에 들었는데 아저씨는 엄마와 헤어진 후 매일 술만 마시다가 폐인이 되어 요양병원에 가셨다고 한다.


엄마의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엄마가 치매에 걸리신 이후, 이따금 그 이야기를 꺼내면 생판 모르는 일처럼 눈을 껌뻑거리신다.

지금은 엄마 생에 그런 분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남의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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