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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Dec 13. 2020

한 달 살기를 연장한 이유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단순한 삶에서 오는 효능감

강릉에 온 지 3주,

서울에 돌아가기로 한 날이 되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방을 빼려고 짐을 싸는데 우울함이 몰려왔다. 차갑고 축축한 회색의 서울, 좁은 방 안 가로 세로 80cm 책상에 앉아 혼자만의 싸움을 계속하겠지..

(참고로 아무리 방을 넓게 쓰고 싶어도 집콕러에게 가로 세로 80cm 책상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혹시 나와 같은 실수를 하려는 독자가 있다면 꼭 재고해 보시길..!!)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을 때는 잠시 나와 아파트 숲을 지나 조금이라도 풀을 볼 수 있는 매봉산, 불광천이나 연트럴 파크로 마스크를 쓰고 산책 겸 러닝을 나갈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내 기준) 굉장히 좋은 동네에 살고 있다. 교통과 문화의 중심이면서도 조금만 걸어 나가면 자연을 볼 수 있는 곳. 틈 날 때마다 좋아하는 서점이나 카페 등 단골 공간을 방문하면서,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도 여행자처럼 지내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강릉에 살면 한국에서 가장 길고 탁 트인 푸른 바다를 언제든 볼 수 있고, 아주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일상을 다채로운 문화로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강릉을 떠난다고 했을 때 나의 발걸음을 그토록 무겁게 만든 것은 자연과 문화 이상의 무언가였던 것 같다.


몰래 찍은 남의 집 겨울 하늘


단순함


복잡한 도시에서는 똑같이 1km를 걷는데도 접하는 정보의 양이 엄청나다. 똑같이 20분을 걸어도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지나치는 간판의 개수가 몇 배는 될 것 같다. 그래서 도시에서의 단순한 삶은 밀려오는 정보의 조류 속에서 나만의 작은 섬, 아니 모래더미를 쌓는 것과 비슷하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면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버려서, 나에 대해 생각한답시고 멍을 때릴 여유가 없었다.



사실 여기서도 마찬가지긴 하다.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니까, 당연히 길을 찾는데 다른 생각을 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실수를 해도 괜찮다'는 안도감이다.


'오늘 7시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8시에 일어났네, 어쩌지?'
'괜찮아. 저녁에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되지'

'오늘 1시간 더 공부했어야 했는데 너무 피곤하네..'
'이번 주엔 다른 걸 했으니까 괜찮아, 이건 다음 주에 하면 되지.'


...




괜찮아, 할 수 있어


사실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아무것도 변한 건 없는데,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효능감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그냥 어렴풋이 일 하러 가는 길이 조금 더 즐거워졌구나 느낄 뿐이다. 조금 늦게 가도 되니까, 가다가 길을 잃어도 되고, 엉뚱한 곳에 내려도 만보기 켜고 조금 더 걸으면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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