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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bysparks Jun 22. 2019

[D+11] 가격은 내가 정한다

우붓 시장 흥정의 기술

발리에 온 지 열흘이 지났다. 하루하루가 빈틈이 없다. 단호는 엄마의 손길이 매 초마다 필요하다. 아이를 보면서 발리를 봐야 하고 그러면서도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에 시달리다 보면 하루가 틈 없이 꽉 차 버리고, 밤마다 기절해서 잠이 든다. 오늘은 생산적인 활동을 위해 우붓 시장에 다녀왔다.


발리에 가면 다들 사 입는 티셔츠가 있다. 국민맥주 빈땅 로고가 박히거나 이국적인 코끼리가 그려진 평범한 티셔츠다. 한국에 있다면 카스나 필라이트가 쓰여 있는 티셔츠를 결코 사 입지 않겠지만, 해외에 있다는 게 그렇다. 뭐가 써 있든 입게 되고, 입고 다니면 기분이 좋다. 우붓시장에서 우리도 남편과 아들의 인도코끼리 티셔츠를 살 계획이었다.


관광객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어느 로컬 시장이나 사정은 비슷하겠지만, 이곳도 흥정이 기본이다. 가격을 물으면 말도 안되는 높은 가격을 부르고 비싸다고 앓는 소리를 하면 조금 깎아주는 척을 하다 가게를 떠나려고 하면 더 내려가는. 이 공식이 가게마다 장사꾼마다 너무 똑같이 반복돼서 나는 좀 지쳤다. 나는 좋은 게 좋은 스타일이다. 흥정을 하는 것 자체가 귀찮고, 소모적인 기분이라 한 두 번 하다 사거나 아니다 싶으면 그냥 사지 않는다. 앓는 소리도 눈치도 밀당도 싫고 못한다. 엄마는 예전부터 그런 나를 못마땅해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남대문에서 도매 장사를 해온 40년 경력의 베테랑 장사꾼인 엄마는 흥정의 달인이다. 전국 팔도의 장사꾼을 상대로 장사를 해온 그녀는 어느 가게에 들어서든 원하는 가격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만의 전략을 끊질기게 펼치는 스타일이었다. '삼촌 우리도 여기서 장사해' '요즘 장사 좀 돼요?' 같은 인사를 서두에 깔고, 나름의 기술로 구슬리고 버티다가 그래도 안되면 현금을 그냥 빨리 손에 쥐어주고 뛰어나왔다. 간혹 가다 엄마보다 더한 장사꾼을 만나기도 했는데, 꼭 사야 할 물건이라 제대로 깎지 못하고 돈을 다 주고 나오면 엄마는 마치 싸움에서 진 사람처럼 무척 분해 보였다. 엄마는 안 살 거면 절대로 어떤 물건도 만지지 못하게 했고, 질질 끌지 말라고 했다. 원하는 물건만 빠르게 속전속결로 결판을 봐야 한다는 주의였다.


나는 발리에서 아주 새로운 유형의 사람을 봤다. 바로 남편이었다. 남편에겐 자신이 정한 정확한 가격이 있었다. 우붓 시장에서 흥정의 기본 과정은 1. 주인이 높은 가격을 부른다 2. 손님이 30~50% 정도 깎아서 가격을 부른다 3. 손님이 부른 가격의 반 정도만 깎아준다. (그래도 여전히 말도 안 되게 비싼 상태)  3. 손님이 나가려고 한다. 4. 못 이긴 척 손님이 처음에 부른 가격에 맞춰준다. 이것도 싸게 준다고 하면서 다른 물건을 막 권한다 5. 손님이 웃으며 물건을 산다 순이다. 이건 손님도 알고, 주인도 아는  둘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물론 기본 프로세스 따위 신경 쓰지 않고 1단계에서 바로 구매하는 여유로운 서양인들도 많겠지만) 그러니까 보통은 주인이 부른 가격에 기준해 할인된 가격을 부르고, 물건을 깎는 최소한 2~3단계의 순서가 있다.


남편은 주인이 어떤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러도 그 가격이나 단계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 가격의 반이라든가 가격에 기준한 어떤 할인된 가격을 부르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정한 가격'을 불렀다. 나는 그곳에서 최소 몇십 년간 자기만의 프로세스와 기술로 장사를 해왔을 우리 엄마와 같은 베테랑 장사꾼들이 오빠의 말에 웃음기를 지우고 아연 질색하는 표정을 몇 번씩 봤다. 티셔츠 가격으로 처음에 400K를 부른 주인은 우리가 200K(약 1만6천원) 정도 부를 줄 알았겠지. 오빠는 바로 50K를 불렀고, 여자는 정색을 했다. 저기요 그건 룰에서 벗어나잖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서 고른 어른 티셔츠의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크기의 아이 옷 가격은 어른 티셔츠보다 조금 비쌌다. 천이 반의 반의 반 값이 들었을 텐데 이건 무슨 계산법인가 싶었지만 주인도 룰을 벗어나는 건 자기 마음이니까. 오빠와 아이의 티셔츠 두 개를 합해 180K에 샀다. 아주 비싸게 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싸게 산 것도 아니었다. 첫 쇼핑은 (남편의 기준에서는) 진 싸움이었다. 티셔츠는 발리 세탁소 건조기에 몇 번 돌려지고 나자 길이가 1/3 정도로 줄어들었다. 싸구려로 판명이 났지만, 그래도 발리에 있는 내내 요긴하게 입었다.


인도 코끼리 티셔츠를 나란히 입은 아빠와 아들


로컬 시장 첫날 경험을 토대로 오빠의 기술은 성장했고 우리는 그 뒤에 싸롱과 탬버린 백을 '우리가 원하는(정한) 가격'으로 구입했다. 특히 싸롱을 팔던, 정말 그 자리에서 50년 넘게 싸롱만 팔았을 것 같은 할머니는 ‘평생 가장 싼 가격에 이 물건을 팔았다’는 허탈한 표정으로 싸롱을 내주었다. 이후 울루와뚜 비치에서 이 싸롱을 펴고 해변에 앉아 있는데 또 다른 싸롱 할머니가 싸롱 하나를 더 사지 않겠냐며 내가 산 싸롱 가격을 물어보셨다. 그 가격보다 좀 더 싸게 주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어쩐지 이 상황이 할머니께 죄송스러웠다. 나는 정말 진짜 싸게 샀기 때문이다. ‘제가 산 가격 들으면 놀라실 거예요'라고 말씀드리자 할머니는 재차 괜찮으니까 말해보라고 하셨다. 가격을 공개하자 할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가셨다. 나는 진심으로 남편이 존경스러웠다.


우붓 시장에서 싸롱을 파는 오래된 상인들


저녁은 밥과 라면, 엄마가 오빠 편에 보내준 김치와 멸치를 먹었다. 반찬은 모두 한국 음식이었는데 뭔지 모르게 나시 짬뿌르 같았다.


단호를 재우고 야외 주방에서 나방과 도마뱀, 모기 친구들에 둘러싸여 이유식까지 만들고 나니 어지럽고 눈 앞이 침침했다. 뭔가를 더 하는 건 무리였다. 이걸 쓰고 있는 지금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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