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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bysparks Sep 02. 2019

[D+12]  뜨갈랄랑 뜨갈랄랑

스쿠터가 준 평화

아싸, 스쿠터를 빌렸다.


드디어 뚜벅이의 삶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붓 사거리에서 우리 숙소까지 오는 언덕길을 걷는 사람은 이 동네 닭들과 우리뿐이었다. 간혹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에겐 애가 없었다. 10kg 아이를 메고 언덕길을 아침저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 다이어트가 따로 필요가 없다. 밥을 두 그릇씩 먹어도 살이 그냥 쭉쭉 빠진다.  날씬한 아줌마가 된다는 건 흐뭇한 일이지만, 생각만큼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살이 좀 쪄도 좋으니 탈것을 이용하고 싶었다. 이날 이후 스쿠터는 두 달 간의 발리 생활에서 우리의 발이 되어주었다.


스쿠터를 빌린 기념으로 그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곳을 차례로 가보자고 남편과 얘기했다. 오늘은 뜨갈랄랑이다. 이름이 너무나 어려운 이곳은 우붓의 계단식 논이 있는 곳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곳의 이름을 정확히 외우지 못하겠다. 뜨갈랄랑 뜨갈랄랑 뜨갈랄랑 뜨갈랄랑. 몇 번씩 말해봐도 입에 착 붙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운 이름과 달리 이곳의 풍경은 역대급이다. 계단식 논이 없는 나라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보성 녹차밭이나 남해 다랭이마을도 모두 다녀왔던 나지만 발리의 계단식 논은 뭔가 달랐다. 아마 우붓의 지형 때문일 것이다. 화산섬으로 이루어진 발리 중에서도 우붓에는 산과 깊은 협곡이 많다. 그러니까 계단의 높이가 다르다. 열대우림 같은 이국적인 풀과 나무로 둘러싸인 산비탈을 땅굴을 파는 마음으로 열심히 열심히 내려가서 만나는 계단식 논은 정말이지 그림 같았다. 군데군데 서 있는 키 큰 야자수가 이 그림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남편이 총대를, 아니 단호를 메고 그 높고 끝없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단호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기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10kg의 귀여운 아기는 그저 아빠 배에 매달려 푹푹 찌는 무더위를 멍한 표정으로 견디고 있었다. 우리는 걷다 멈춰서 풍경에 감탄하고, 다시 걷다 서서 또 한 번 감탄하기를 반복하며 뜨갈랄랑을 구경했다.


뜨갈랄랑은 인스타그램에 '#발리 인생 샷'이라고 치면 나오는 '발리 스윙'이 있는 곳이다. 발리 스윙이 인기를 얻은 뒤 비슷한 풍경이 있는 곳에 갖가지 다른 스윙들이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원조는 이곳으로 알고 있다. 하늘거리는 실크로 만든 치마를 입고 나무 그네를 탄 뒤 하늘 위로 솟아오를 때 사진을 찍으면 그네를 타는 아름다운 자태와 함께 발아래로 펼쳐지는 계단식 논의 모습이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처럼 나오는 사진이다.



나는 찍지 않았다. 찍을 생각조차 안 했다. 치마도 없고, 인생 샷에 대한 의지가 없다.


사진 대신 뜨갈랄랑이 코 앞에 펼쳐진 카페에 앉아서 과일 빙수 에스부아를 먹었다. 단호도 이제 제법 커서 과일 빙수 정도는 함께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그리고 발리에서 와서 '평화롭다' '아름답다' '행복하다'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 순간이었다. 바다가 좋아 발리를 찾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 역시 서핑을 생각하고 이곳에 왔지만, 스님 같은 바지와 히피 같은 얼굴을 하고 우붓에 몇 달 몇 년씩 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주도를 자주 가면 갈수록 해안도로보다 내륙이 훨씬 아름답다고 느꼈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랄까. 바다는 아름답지만 계속 보고 있으면 마음이 텅 비는 기분인데 산이나 들판을 보고 있으면 반대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풍요롭고 청명하다. 우붓도 그렇다.



남편이 운전하는 스쿠터 뒤에 아기띠로 단호를 메고 앉은 뒤 단호와 남편을 꼭 잡고 달렸다. 스쿠터를 타고 만나는 우붓의 풍경은 달라 보였다. 걸어서 만나는 좋은 것들이 있지만 탈 것 위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보게 되는 새롭고 여유로운 풍경이 있다. 무수히 많은 작은 가게들, 나무들,  개들,  새들,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코너를 돌 때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낯선 동네, 동네를 지나 갑자기 나타나는 좁은 오솔길, 그 옆으로 펼쳐진 넓고 푸른 논밭. 이런 장면들이 있었구나. 스쿠터를 타고 다니니 넘나 좋구나. 행복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남편을 잡느라 잔뜩 들어간 내 손아귀도 점점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단호는 처음 타는 스쿠터에 놀란 듯했다. 빠른 속도와 윙윙 거리는 소리와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에 놀랄 수밖에. 행여 울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 내밀고 길을 보다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잠이 들었다. 두 번째 스쿠터를 타려고 하자 '으으으' 같은 소리를 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놀랍지만 재밌는 모양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도 그런 소리를 내다가 그다음부터는 시시하다는 듯 그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발리의 여느 신생아들처럼 익숙한 표정으로 스쿠터를 탔다.


저녁은 숙소 앞에서 바비사테(돼지고기 꼬치)를 구워 팔던 아주머니네 사테를 맛보기로 했다. 한적한 숙소 앞 골목은 관광객들이 다니는 번화한 거리가 아니다. 현지인들도 그 길을 걸어 다니진 않는다. 아주머니는 남편과 번갈아 이곳에 나와 오후 몇 시간만 나와 사테를 구워 파는 것 같았다. 누가 와서 먹을까 싶은 자리였는데도 늘상 한 둘씩 사람이 있었다. 주로 동네 사람들이었다. 익숙하게 돈을 내는 로컬 사이에서 가격을 묻는 외국인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을까 싶어 봉투에 사테를 담아 사가는 앞사람에게 조용히 얼마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부처님 인상의 사테 아주머니는 바가지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빠른 손놀림으로 바비사테를 굽고, 밥을 싸갈 건지 묻고 양념과 함께 검은 봉투에 넣어주셨다.



바비사테는 맛이 없었다. 나는 돼지고기도 좋아하고, 비계도 좋아하고, 껍데기도 좋아하지만 껍데기와 비계가 주를 이룬 바비사테는 그저 그랬다. 역시 꼬치는 닭이지(비둘기도). 대신 아줌마네 밥과 삼발소스는 식당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풍성한 맛이었다. 소스를 밥에 비벼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바비사테는 그저 그랬지만, 아줌마한테 사테를 샀던 그 풍경이 예쁘고 좋았다. 발리 같았고, 우붓 같아서 좋았다.



스쿠터를 타고 다니니 사람이 좀 밝아진 것 같다.

예쁘고 여유로워 보이는 풍경들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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