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하나, 시간에 하나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 돼요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
그대 무지개를 찾아올 순 없어요.
1987년, 이문세의 '소녀' 노래는 감미롭고 좋았다.
난 아이에서 예쁜 소녀로 환승 타려고 몸부림쳤었다.
모처럼 엄마가 쉬는 날이었다.
쥬단학 화장품 방문판매 아줌마가 왔고,
마루 바닥 한가운데서 보따리가 스르르 풀렸다.
우리 집 거실은 백화점 1층 체험존이 됐다.
엄마는 영양크림을 보여 달라고 하고,
아줌마는 “이거는 진짜 좋아요”를 몇 번이나 말했다.
나는 옆에서 계속 헷갈렸다.
영양이 사람 얼굴에 바르는 건지,
동물 영양인지.
엄마는 샘플을 더 달라며 옥신각신 했다.
아줌마는 외상 장부 수첩을 적다가,
갑자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뜬금없이 고등학생이냐고 물어봤다.
“아니걸랑요! 저는 중1이 걸랑요!!”
콧구멍까지 억울함을 뱉듯 대답했다.
나는 문을 휭 닫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진지하게 거울을 한 번 봤다.
'나 몇 살로 보여?'
'아줌마다!!'
대답하는 것 같았다.
잽싸게 침대에 얼굴을 쑤시며 누웠다.
막내고모랑 다녀도
자꾸 친구로 오해받는 얼굴이었다.
조금만 더 크면,
조금만 더 바꾸면
뭔가 이 상태에서 탈출할 것 같았다.
마침 오늘 학교 뒷자리 애들 머리는 노랬다.
왠지 황금색 머리를 하면
전기세 걱정부터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었다.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맥주인지, 과산화수소인지로
염색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십계명에는 염색하지 말라고 없었고,
집에도 맥주는 없었다.
나는 약국으로 주저 없이 가서
과산화수소를 200원 주고 사 왔다.
머리카락을 새끼 강아지 만지듯,
한 올 한 올씩 소로소로 뿌리며
내 미모 폭발을 야무지게 기대했다.
점점 풍년이 돼 가는 머리색을 보면서
벅찬 설렘으로 조금만 더 기다렸다.
잔뜩 긴장하며 쓱 거울을 봤다.
햐 이건 마돈나 가수보다 더 이뻐 보였다.
관광열차 춤도 쳐보고 새침한 입술도 쪼여봤다.
'학교 가면 애들이 이쁘다고 놀래겠지?'
놀래는지 놀리는지 구분도 못하고
공주병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내 모습에 감동했다.
그런데 계속 계속
노랗다 못해
백발머리로 뜨거워졌다.
중천의 해가 머리에 얹힌 느낌이었다.
큰일 났다 싶어서
방 문도 못 열고
이불에 몸을 숨겼다.
손톱은 점점 허해지고
지문에 물집이 뽀글뽀글 올라왔다.
냄새는 팍 코를 찌르진 않는데,
뭔가 야비한 향기였다.
하필 방광까지 수문을 열라고 협박했다.
그때 오빠가
수학 학원에서 돌아왔다.
동생 목소리,
엄마 목소리가
내 방문 앞에 겹쳤다.
오줌댐은 터질 것 같고
머리에는 태양이 지글거리고
손은 명절날 만두피였다.
앗, 내방 다락이 보인다!!
순간 요망한 생각이 내린다.
'저기 올라가서 볼일 봐버려?'
검정 봉다리로 마무리할까 고민하다가,
아니다.
이건 절대 아니다.
인간이길 포기한 거다.
나는 정오의 태양을 머리에 이고 지고,
후다닥 화장실로 튀었다.
밖에서 오빠가 소리쳤다.
“엄마, 금방 루달이 머리색 이상해요!
날라리같이 염색했데요!”
“뭐? 아까까진 멀쩡했는데?”
“아니에요. 쟤 미친 것 같아요.”
엄마가 화장실 문을 급하게 당긴다.
자꾸만 나오라고 문짝이 거덜 나듯 두들긴다.
내 이마에는 물이 송골송골 솟고,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고.
아무 핑계도 안 떠올랐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항복하듯 문을 열었다.
엄마, 오빠, 동생의 눈이
한꺼번에 커지며 어우렁더우렁 거렸다.
오빠는 내 태양을 살벌하게 모독했다.
“ 너 그렇게 백발 하니까 늙은 돼지 같아"
나는 그냥 솔직히 다 말했다.
약국, 과산화수소, 200원... 이뻐지고 싶다고.
엄마는
“뭐 뭐를 머리에 뿌려? 희한한 게 태어났어!"
오빠는
“너 그러다 대머리 된다” 며 거들었다.
엄마는 갑자기
아까 파운데이션 사고 싶은 거
아끼느라 참았다면서,
내 머리 때문에
돈 낭비하게 됐다며 지갑을 들었다.
엄마랑 나는
집 앞 샤론 미용실로 갔다.
할머니들이 줄지어 비닐 머리로 앉아계셨다.
검은색, 새치용인지 모르겠고..
난 제일 싼 걸로 염색했다.
내 머리도 조용해지고
얼굴도 조용해지고
집도 조용.
'인생 쉽지 않네'
방에 누워
천장을 보며 홀린 듯 저지른
내 정신 나간 용기를 반성하...
하지만
아까 잠깐,
이쁘긴 했다.
과산화수소 양 조절을 잘해야겠다.
다락에 깡통을 올려두고
다음엔 더 조심해서
다시 시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맞다! 다락에 상자 하나가 턱 하니 보였는데
궁금해서 꾸역꾸역 기어 올라가 열어봤다.
그런데
나의 태양만큼이나 뜨거웠을
아빠의 시간이 그곳에 있었다.
아빠가 군대 시절 써놓은 두꺼운 책.
신문조각, 자작시, 비키니 입은 여자등...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스크랩북 해놓은 것이 재밌었다.
마지막 한 장을 넘길 때는
아빠의 젊은 시절 냄새가
괜히 내 철딱서니를 창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상자 안에는 한문으로 된 책들이 빛나고 있었다.
아빠가 소장하던 주역, 풍수지리책이었다.
사랑하는 아빠와
같이 읽는 심정으로
시간 여행을 가게 될 것 같다.
오늘은 머리에 올린 날이었다.
불타는 태양,
노을 진 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