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트라우마의 필터
무대의 조명이 꺼진 뒤, 조용히 내면의 문이 열렸다.
해킹의 광풍이 잠잠해지고 2년이 흐른 어느 시점,
두 개의 꿈을 꾸었다.
그 꿈들은 설명으로는 다 전해지지 않는,
감각의 언어로 남아 있었다.
첫 번째는 밍크고래의 꿈이었다.
나는 심해처럼 깊고 고요한 곳에 있었고,
그곳에서 거대한 밍크고래 한 마리를 발견했다.
처음엔 죽은 줄 알았다. 벼랑 끝 모서리에 고래가 가만히 몸을 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깊은 잠이었다.
공포와 낯섦으로 가득 찼던 현실과 달리,
고래는 말없이 거대한 존재감을 품고 있었다.
그건 그 시절 무의식 속의 나 자신이었다.
표면에서는 두려움에 휘말려 있었지만,
심해의 고래는 조용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우주의 꿈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우주의 한가운데로 찰나 이동했다.
양옆에는 항성들이 있었고, 그곳은
고요함을 넘어 공간 자체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 진동은 마치 베토벤 ‘운명’의 웅장함과
냉장고의 낮은 지지직 소리를 반반 섞은 소리였다.
항성의 색은 상상하는 영롱한 빛이 아니었다.
주황과 갈색, 마치 몸빼바지 같은 촌스러운 색감으로
존재감을 보였다.
그 공간은 아름답지 않았지만, 신비하고 강렬했다.
내 감각은 완전히 열려 있던 것 같았다.
바로 장면이 바뀌어 나는 우리 집에 소환되었다.
창문 밖엔 거대한 달이 떠 있었고 점점 내 집 앞으로 떨어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어, 어, 어…” 놀라며 뒷걸음질 치는 사이, 달의 무게로
간격을 두고 ‘쿵~ 쿵~~’ 집을 부딪혔다.
그 두려운 진동에 놀라던 중 잠을 깨버렸다.
뒤돌아보면, 이 두 꿈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었다.
심해의 고래는 나의 무의식이 버티고 있던 모습이었고, 우주와 달은 다시 현실로 나를 깨우는 신호였다.
이제는 스스로를 깨워야 할 알람이라는 걸.
며칠 뒤, 코러스를 함께했던 동생들의 카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태풍이 지나간 뒤 청명함을 선사하듯
막혀 있던 물줄기가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온니, 온뉘~ 오늘 시간 괜춘하세요?
커피 마시러 집 앞에 갈게요!”
" 오야 오야 ~1시간 안에 안 오면
오온뉘 이민 간다! 빨리왕"
20살 차이가 무색하게 조금씩 가까워졌고,
어느 날 동생들이 나를 청담동 재즈홀로 데려갔다.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나는 오래 잊고 있던 재즈공기를 적시러 갔다.
그날따라 좋아했던 ‘러스트레일’ 칵테일이 기억났다.
한 잔, 두 잔, 어느새 세 잔을 비우고 시계가 자정에 가까워졌을 무렵,
스테이지에서 멘트가 흘러나왔다.
“오늘 생일이신 분 계신가요?”
마침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부끄러운 표정으로 콱 일러줬다.
“사실... 언니~~ 오늘이 생일이당!”
“진짜요?!”
동생들이 깜짝 놀라 메모지에 내 이름을 적어냈다.
주변 손님들의 박수와 함께 팡파르가 울렸다.
나는 즉흥적으로 턱관절을 츤데레로 흔들었다.
아직도 털어내지 못한 잔금들이 튀어나와
번데기가 벗어낸 기운으로 나를 덧입혔다.
그날을 시발점으로,
어둠 속에 웅크리던 내가 제대로 세상에 부딪혔다.
점점 잃어버렸던 관계들을 조심스럽게 추적하며,
매듭이 끊긴 자리들을 하나씩 메워나갔다.
물론 외모는 많이 달라졌지만 집 밖이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멈춰 두었던 앱들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그동안 쪽지 함에 쌓여 있던 메시지들과
카톡엔 생일선물 알림이 고스란히 묵혀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내가 잠수 아닌 잠수 속에 있던 그 시간 동안,
나를 끝까지 찾고 있던 사람들의 흔적이었다
그 진실한 마음들로 인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트라우마의 강을 건너는 것은
감정을 표출하는 것과 따뜻한 관계라는 것을.
강함을 추구하기보다 '숨 쉬는 것'을 선택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숨이, 여전히 내 안에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強者 莫之能勝.
천하막유약어수 이공견강자 막지능승.
세상에서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지만,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는 것은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 노자-
고통은 두꺼웠지만, 나는 흐르기로 했다.
그 순간, 완벽함은 사라지고 호흡만 남았다.
그 숨이, 나를 다시 세상으로 밀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