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가 들리지 않고, 보이다

8. 밖으로 한 걸음

by 루달

고통은 통과하면서

더 깊은 성숙으로 진화하는 것.



이미지 작업으로 몰두한 시간들이

나의 쇠사슬을 풀어주듯

서서히 정화되기 시작했다.



업데이트로 퍼즐이 맞춰지다



시간이 흘러,

모든 게 잠잠해졌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휴대폰이 업데이트가 되면서

그동안 보지 못한 알림 들을 본 후 몸이 굳어버렸다.


해킹 당시 지나간 시도들이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 나는 컴퓨터가 없고

폰 하나로만 산다 "

Mac, Windows, 낯선 이름의 기기들.
내가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환경에서
로그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또한 기기명은 내 폰과 같았지만,
위치는 달랐다.
부산, 의왕시, 강원도, ⋯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들.


집요하게도 연결되어 계속 암흑 속에 지낸 것이다.

비밀번호를 누군가 바꿔 버리니 볼 수가 없었다.

각 사이트마다 그동안 누적된 경고 알림들.



유심이 복제된 된 것 밖에는 도무지 답이 없었다.
그 시절, 타 지역 로그인 차단을 켜둔 상태였다.
그런데 네 OO에서도 ‘차단이 해제되었습니다’
그 당시 비밀번호가 오류 났던 이유도 알게 된 것이다.




고통을 개인이 아닌 사회가 함께 겪던 순간


2021년 코로나19중에 비대면으로 급히 전환됐었다.

은행도, 포털도, 상담창엔 사람 대신 챗봇이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같은 말만 반복되어 답답하던 때였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채팅창에는 대기 인원 수백 명이 떠 있었다.
상담원들의 목소리엔 피로가 묻어 있었다.


AI는 막 태어나 세상을 배우고 있었고

상담원들은 기술과 인간 사이에서 길을 잃을 때였다.


그건 디지털 전환의 과도기.
모두가 버퍼링 걸리던 시대였다.

세상은 멈춰 있었고, 감정은 로딩 중이었다




2021년 8월에 해킹을 감지한 후

4~5개월 뒤에 언론이 “유심 복제 피해 발생”이라

보도한 사건들과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


나는 바로 직전이었고 그 해킹의 흔적을

아무도 관심 있게 듣거나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틈에서, 시대의 진통을 맞은 듯했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균열 한가운데서,

참 오래도 고립됐다.


그때, 벽을 바라보며 끔찍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눈만 뜨면 벽이 있었고,

거기에 적힌 수많은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마치 주민등록증처럼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흔적들.



그 벽지엔 냄새가 있었다.

공허의 허술한 냄새.

그 벽에 붙은 채, 꼼짝하지 못하던 시간들이 내리쳤다.


알림 문자들이 하나씩 뜰 때마다,

과거의 그 공허가 현재의 현실로 덧입혀졌다.

그 시절엔 이해할 수 없었던 이상한 공포들.

공공기관에서 하소연만 하던 답답함까지…

모든 퍼즐이 ‘지금’의 화면 위에서 정확히 맞물리기 시작했다.


그건 단순한 증거 확인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벽지에 눌려 있던 내 감정과 현실이 한 점으로 수렴되는 순간이었다.





“사랑은 통증의 해독제다"


그 무렵, 엄마는 내 탈모와 건강을 위해

불고기, 홍어 무침, 동백나무 추출 기름을 싸서

2시간을 지하철 타고 오셨다.


이름도 낯선 식물들을 작은 도자기 화분에

'LOVE' 문구의 장식까지 올려서

구르마에 끌고 오신 것이다.


“엄마, 이렇게 무거운 걸… 이걸 다 끌고 온 거야?”


잔뜩 주름진 손, 굽은 허리,

그 모든 모습이 한순간에 가슴을 쳤다.


엄마는 이번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셨다.


“주여! 주여~! 사랑하는 우리 딸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나게 기적을 베풀어주쑈서! 믿쓥니다!”


머리를 어찌나 세게 눌러 흔드셨는지

뭐든 튀어 나와야 했다.


“아멘! 아멘!!'


어쩌면 효도라고 생각해서 더 크게 화답했었다.



' 엄마 미안해요. 오래도록 건강하셔요'



엄마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던 걸까,

아니면 아직 내 안 어딘가에 머물러 있던 걸까.


점점 머리카락이 한 올, 두 올 다시 자라났다.

정수리에 동백기름을 바를 때마다

엄마의 살 냄새가 끼어들어 피어올랐다.


화분에 물을 줄 때도

엄마의 목소리가 잔물결처럼 흘러 오는 듯했다.


'사랑한다 언제나 ⋯'



'Love' 문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나를 삶 쪽으로 천천히 이끄는 파동의 주문 같았다.


그날 밤, 오랜만에 라면을 끓였다.

파 송송. 계란 척 깨지는 소리도 뮤지컬로 들렸다.
평범한 냄비 속에서 세상이 조금은 다시 끓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몸으로 작은 빛이 되어 서다


그렇게 약 3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점점 몸과 마음이 회복되던 어느 날,

뮤지션 친구의 연락처를 추적 끝에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반가움이 터져 나왔다.


“야! 도대체 연락이 안 돼서 별생각 다 했어.

안 그래도 이번 콘서트 하는데 네가 있어야지.

공연 포스터도 이미 다 만들었는데, 다시 코러스 네 이름 넣을 테니까 합류해!”


“앗… 그래? 근데 나 그동안 살도 엄청 쪘고,

노래 쉰 지도 몇 년 됐어.”


“아 됐고! 홍대 바람도 좀 쐬고, 무대 찢어 버리자!”


그날은 오랜만에 느끼는 소풍 전날의 설렘이었다.

나는 그렇게 다시 세상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에 섰다.

화려한 조명이 내 몸을 주시하자

기다렸다는 듯 감각들이 깨어났다.


가수 데뷔 20주년 콘서트는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무대 위에서 들었던 환호와 조명의 열기가

내 안쪽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세포마다 울렁거렸다.




공연이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는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모였다.

몇 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밤새 회포를 풀며 정상 컨디션 궤도에 진입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 눈썹을 리듬 있게 움직였다.


'솨라있네'

고립의 시간에선 부제 했던

근육의 밀도로

눈썹 브레이크를 춤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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