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방어선 (防禦線)
불안의 씨앗은 마음을 뚫어 몸까지 뿌리내렸다.
동물처럼 예민해지고, 자아가 빠져나간 생물이었다.
이제 그만 항복하라는 듯했다.
어느 날, 백기를 들듯 머리카락이 '펄럭' 빠졌다.
처음엔 작은 오솔길
점점 큰 숲길, 결국 심각한 탈모가 됐다.
머리 두피도 시위하듯 열꽃이 번졌고,
분노와 화병의 잔해는 끔찍했었다.
거울 속의 나는 독이 올라와 화산이 폭발한듯했다.
그렇게 눈조차 뜨기 싫은, 우울함의 짙은 밤들이었다.
잠잠한 내가 걱정이 되셨는지, 엄마가 집으로 찾아왔다.
내 텅 빈 머리를 보자마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렸다.
“워메 뭐시여. 왜 쑥대밭이 된겨! 주여 제가 잘못···”
“무슨 말이야? 내 탈모랑 엄마 죄가 무슨 상관인데?”
“나가 죄가 많아서 고난과 시련이 많을 수밖에 없어”
"일찍 과부 되고, 자식 셋 키우느라 고생만 한걸 "
엄마는 가방에서 뒤적거리더니 곱게 싼 비닐을 꺼내셨다.
오천 원권이 섞인 현금 150만 원을 내 손에 쥐여주시며
“아이폰은 보안이 겁나 좋다더라. 사러 가자 ”
엄마의 손은 굳었고, 눈빛에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함께 매장으로 가서 구입했다.
하지만 새 기기마저도 두 달을 못 넘겼다.
갑자기 비밀번호가 잠겨버린 것이다.
머릿속은 1초도 안 쉬고 분노와 이성이 할퀴었다.
창문 밖의 시계는 가파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호 O번 OOO 당선을 축하합니다'
시간을 못 이긴 듯 오래된 현수막은 너덜 너덜 했다.
내 방의 시곗바늘은 고장 난 듯 가는척하다가 멈추고.
이 정체 모를 투명 망토와 싸웠던 오랜 시간들은
무용지물이라는 걸 세뇌하듯.
시간이 지나 결국 마지막엔 경찰 지인이 나섰다.
“안 되겠다. 통신사까지 바꾸자. SK 쓰고 있는데
이건 괜찮을 거야. 명의는 내가 빌려줄게.”
난 탈출구란 말이 무색하게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타인의 이름으로 개통되는 불편한 기기였다.
20년간 추억을 간직한 번호를 스스로 잘라냈다는 현실.
무언가를 얻은 순간이 아니라, 삶의 한 조각이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정체성까지 훑어봤다.
엄마와 지인에게 걱정만 끼치고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 내 모습이 해충 같았다.
날마다 타인의 명의에 불편함과 답답함이 천장에 닿았다.
어느 날 밤, 무의식처럼 망치를 들었다.
그리고 침대 옆 바닥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만이 마지막 방어 수단이 될 거라 믿었다.
그건 계획도, 이성도 아닌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부터 방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나는 전선(戰線) 위에 있었다.
'누군가 걸리기만 해 봐. 기억하자 저기 저 자리야!'
그리고는 생각을 희석하며 합리화한다.
'먼저 나만 건들지 않으면 도구일 뿐이야. 그렇지?'
그날 이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긴장된 자세로 잠들었다.
침대 밑의 망치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침묵을 발설하고 있다.
내 방의 방어선은
평온을 가장한 전방의 휴전선 냉기로 흘렀다.
“억눌린 에너지가 밖으로 향하면 공격이 되고,
안으로 향하면 자책이 된다.
둘 다, 살아남기 위한 왜곡된 몸부림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